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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이태원 곳곳서 참사 100일 추모공연… 황량한 거리 채운 ‘위로의 선율’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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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연 보러 온 이들 대부분 20∼30대

“참사 피해자 중 또래 많아 놀러오기 미안

공연 관람 계기로 이태원 다시 찾을 것”

“한동안 노래를 부르면서 ‘이래도 되나’ 하는 자기검열에 빠졌고, 공연도 잘 못 했습니다. 공연을 너무 무겁게 보지는 마시되, 왜 기획된 공연인지만 한번쯤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4일 오후 4시 이태원역 부근 한 주점. 60여명의 관객이 싱어송라이터 하헌진의 감미로운 기타 사운드에 빠져들었다. 소극장 공연 같은 분위기 속에 관객들은 노래를 경청하고, 때로 하씨와 소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씨는 “한국은 어떤 일이 생기면 금방 잊히는 것 같다. 가을에 있었던 일은 겨울에, 겨울 일은 봄에 잊힌다”며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를 기억하되 추모공연은 가볍게 즐겨달라고 요청했다.

이태원 압사 참사 100일을 맞는 주말(2월 4, 5일) 이태원역 일대 9개 주점과 클럽에서 ‘렛 데어 비 러브(사랑이 자리 잡기를), 이태원!’이라는 추모공연이 열렸다. 이태원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상인과 거주민이 주축이 된 비영리단체 ‘팀 이태원’이 꾸린 캠페인에 예술인들이 뜻을 모았다.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2017년)’ 직후 열린 자선공연에서 영감을 얻은 이번 행사는 관객이 티켓 한장으로 이태원 곳곳의 주점과 공연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음악 축제를 즐기는 방식이다. 수익 전액이 기부되고, 무보수로 이뤄지는 이번 공연에는 브로콜리너마저, 이날치, 말로밴드, 오지은 등 유명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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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4일 쏘왓놀라밴드가 이태원 골목을 돌며 추모 의미의 행진 공연을 하고 있다. 유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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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황량했던 거리 채운 ‘위로의 선율’

이날 오후 2시반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차려진 매표소 앞에서 마칭밴드 ‘쏘왓놀라밴드’의 연주로 추모공연의 막이 올랐다. 밴드는 이태원 길을 행진하며 뉴올리언스풍 재즈를 연주했다. 장례식에서 재즈 음악으로 애도를 표하는 뉴올리언스 문화를 재현한다는 의도다. 밴드 리더인 조운(29)씨는 “이태원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소중한 장소”라며 “추모 공연은 처음이라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우리의 연주로 위로와 사랑이 전달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행진을 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이 밴드와 뒤따르는 관객들은 참사가 발생한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함께 걸었다. 추모 글귀가 적힌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에 시끌벅적한 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적막만 가득하던 자리에 음악 소리가 퍼진 건 참사 이후 처음이었다. 주변 거리를 걷던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골목을 통과하는 행렬을 구경했다.

밴드를 따라 걷던 최정민(30)씨는 “이태원에 오기 꺼려졌는데 오늘 밴드를 따라 걸어보니 참사가 일어난 골목도 일반적인 길처럼 느껴졌다”며 “오늘 술을 마시고 공연을 보면서 즐기러 왔는데 그러다보면 이태원에서 즐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덜해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잠시 후 밴드는 공연장인 한 재즈바에 도착했고, 관객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후 3시반쯤 되자 좌석은 꽉 들어차 서서 관람하는 이들이 생겼다. 밴드가 부른 추모곡은 ‘When I Die You Better Second Line(내가 죽으면 세컨드 라인을 해줘)’으로, 여기서 ‘세컨드 라인’은 장례식 행렬에서 음악에 맞춰 춤추며 밴드를 따라오는 행렬을 뜻한다. “내가 죽으면 내 관에는 트럼펫을 넣어주오”라는 가사가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가슴에 박혔다.

오후 7시에 공연을 한 ‘브로콜리너마저’의 멤버 윤덕원씨는 무대 위에서 “가슴 아프고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졌는데, 아물고 정리되기보다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았던 100일이었다”며 “모든 것이 순리에 맞게 위로할 것은 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토요일 밤이 무르익어 가면서 9개 공연장은 모두 만석이 됐고, 스탠딩 콘서트에 온듯 열기가 뜨거웠다. 사람이 너무 몰리자 관객들의 추가 입장이 중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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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이태원의 한 주점에서 열린 참사 100일 맞이 추모공연을 관객들이 즐기고 있다. 팀이태원 포토그래퍼 김한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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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관람 계기로 다시 이태원 찾을 것”

이날 추모공연을 보러 온 이들은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었다. 매표소 앞에는 일찍부터 수십명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그동안 이태원 방문이 꺼려졌다고 했다. 이가은(23)씨는 “참사 피해자 중 내 또래가 많아 이태원에 놀러오기 미안했다”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이태원에 오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추모공연 기획자이자 이태원 일대에서 9년째 주점을 운영 중인 황순재(45)씨는 “참사 후 불편한 감정 때문에 이태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럴 때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참사 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고, 힘든 점을 함께 극복하자는 취지로 “추모에 밝은 의미를 더한 것”이라고 황씨는 설명했다. 종교나 정치적 개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황씨는 “순수하게 이태원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강조했다. 이번 무보수 공연에 참여한 아티스트는 총 97팀에 달했다.

이날 공연장에서 만난 윤여진(32)씨는 “아티스트 라인업과 공연 취지가 모두 마음에 들어 양일 티켓을 모두 예매했다”며 “공연이 코로나19와 참사로 침체된 이태원의 분위기를 전환할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디음악 팬이라고 밝힌 허유진(30)씨는 “평소 두 달에 한번은 이태원 록 공연장을 찾았지만, 참사가 일어난 골목길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며 “참사의 상처를 씻어내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공연을 통해 이태원 문화를 활성화하는 시도가 좋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참사 이전 주말엔 하루 매출이 900만∼1000만원 정도 나왔다는 이태원 상인 권구민씨는 이날 추모공연 관련 플리마켓을 열면서 “오후 9시쯤 가게는 만석이 됐고, 어제와 오늘 각각 매출 200만원 정도 나올듯해 이 정도면 월세는 감당이 가능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공연이나 행사가 없었던 다른 매장은 이날도 여전히 썰렁했다. 인근 주점의 직원 이모씨는 “이태원 상권이 1∼2주 전부터 좋아지는 추세이고,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서도 “참사 전에 비하면 아직 매출이 5∼10%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일보는 이번 참사로 안타깝게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정지혜·유경민·이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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