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이슈 국방과 무기

키이우엔 '지정생존자' 있다…"전투기 간절" 호소한 그의 당부 [우크라이나 르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르포④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을 땐 여느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마이단광장 등 주요 공공장소에 무장 군인들이 수십m 간격으로 배치돼 경계 중이란 점. 도시 곳곳의 그라피티(벽화)도 눈에 띈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서방제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는 벽화 옆으로 시민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인근 도시 이르핀 등을 방문했을 때도 포격을 당한 아파트 외벽에 발레를 하는 아이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전쟁 승리와 일상 회복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읽혔다.

중앙일보

우크라이나 이르핀의 아파트 외벽이 온통 총탄 흔적으로 가득하다. 벽 아래엔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져있다. 김홍범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두고 2일(현지시간)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국제사회에 무기 지원을 호소했다. 한국 기자라고 하자 “한국에서도 어떤 무기든 보내주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린 꼭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전 초 의용병으로 총을 들었고 곧 동부 전선 리만·바흐무트 등에 지원 물품을 전달하러 간다는 제냐(30)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무기 뿐이다. 용기와 승리에 대한 염원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키이우 시내 카페에서 만난 니콜라이(25)는 최근 서방이 지원을 약속한 영국제 챌린저2, 독일제 레오파르트2, 미국제 에이브럼스 탱크를 반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줬다. 80만 회 가량 재생된 이 영상이 올라온 계정 이름은 ‘세인트 재블린(Saint Javelin)’. 이번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제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이 마치 수호성인과 같다며 붙인 별명이다. 니콜라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재밌는 영상을 보면서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기도 한다”며 “전쟁 초부터 간절히 요구해온 서방의 탱크 지원이 이뤄져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했다. 이날 키이우를 방문한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레오파르트2 전차 투입을 서두르기 위해 기술교육과 특수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중앙일보

지난달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모습.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는 우크라이나 군인 그림이 그려진 벽 앞을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지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일 키이우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세르히 쿠잔(38) 우크라이나 국방부 고문을 만났다. 하르키우 출신의 변호사로 군사 분야 싱크탱크인 안보협력센터 창설자인 그는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회의 고문을 지낸 군사 전문가다. 남부 헤르손 등 최전방을 살피고 막 돌아왔다고 했다. 쿠잔 고문은 “전황을 타개하려면 적(러시아)의 지휘부와 보급 창고를 타격할 무기가 필요하다”면서 “우리가 전투기와 사거리 100㎞ 이상의 미사일을 간청하는 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힘줘 말했다. 다음은 쿠잔 고문과의 일문일답.

중앙일보

세르히 쿠잔 우크라이나 국방부 고문(왼쪽)이 지난 2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전황을 타개하려면 전투기와 장거리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한국도 지원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김홍범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최근 미국과 독일이 주력탱크 지원을 승인했는데, 전황 타개책이 될까.

A : (탱크 지원은) 엄청난 도움이며 너무도 감사하다. 다만 그 자체로 전환점을 만들진 못한다. 현 시점에서 정말 필요한 건 전투기와 장거리 미사일이다. 조만간 러시아의 대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돼 절박한 상황이다.

Q : 러시아의 대공세를 전망하는 이유는

A : 현재까지 수집된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이렇다. 러시아군이 각 전선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치장물자(확보 물자 중 평시 운용량 초과분)를 동원 중이다. 통상 대규모 공격 전의 준비 상황이다. 또 지난달 초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총참모장이 새로 부임한 뒤 전선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동쪽에 공수부대가 집결했고, 그곳에 있던 바그너 용병그룹 일부는 남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공격 시점은 이르면 2월 중순, 탱크 등 서방의 무기가 도착하기 전을 노릴 거다.

Q : 우크라이나의 준비 상황은.

A : 먼저, 러시아의 총공세가 전선을 뚫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니라고 본다. 러시아는 미사일도, 숙련된 병사도 부족한 상태다. 다만 잘 훈련된 신병이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 위협 요소다. 지금 러시아는 병력을 잃어도 신경쓰지 않고 밀어붙이는 구소련 시대식 전술을 쓰고 있다. 이를 막으려면, (우크라이나 영토 내)후방에 있는 러시아 지휘부를 타격해야 한다. 장거리 미사일, 전투기가 그래서 꼭 필요하다.
중앙일보

세르히 쿠잔 우크라이나 국방부 고문(왼쪽)이 지난 2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홍범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 우크라이나군에 당장 해결할 과제가 있다면

A : 현재 전선이 길어지고 많아졌다. 이를 줄여나가야 한다. 동부 돈바스 지역부터 크림반도까지 이어진 러시아의 육로회랑을 끊는 것도 중요하다. 육로를 통한 러시아의 보급로만 막는다면 크림반도 수복까지 가능해진다.

Q :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은.

A : 개전 후 1년간, 우리는 충분한 무기 지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잘 싸울 수 있단 사실을 입증했다. 개전 초기, 우리에게 스팅어 대공 미사일이나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등 게릴라성 공격용 무기를 주던 서방이 이제 탱크 등 중무기를 주고 있지 않나. 다만 지금 가진 무기만으론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한국을 포함한 더 많은 나라가 우리를 도와야 전쟁이 끝난다.

Q : 이 전쟁이 국제사회, 세계사에 어떻게 남을 것으로 보나.

A : 21세기판 러‧일 전쟁(1904~05)이 될 거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일본에 패한 뒤 무너졌고 니콜라이 2세는 마지막 차르(황제)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얕보고 시작한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면 러시아 권위주의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도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될 것이다.

중앙일보

김홍범 기자


인터뷰를 마친 뒤 쿠잔 고문은 “기사에 사무실 위치를 노출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보안상의 이유다. 현재 우크라이나 국방부 관료들은 한 자리에 모이지 않고 각기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만일을 대비해 ‘지정생존자’를 남기는 방식이다.

※우크라이나 르포 5회로 이어집니다.

■ '러·우크라 전쟁 1년' 디지털 스페셜 만나보세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키이우=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