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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위대함과 위험 사이, 속단할 수 없는 ‘사랑’의 이해[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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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모성신화는 남다르다. 가족 친화적인 문화권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미나리>나 <파친코> 같은 작품들이 ‘K할머니’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이기도 한데,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휴머노이드다. 최근 OTT에 올라와 세계 순위에 랭크된 <정이>는 전설적인 여성전사가 사망 후 전투 로봇으로 태어나지만, 친딸에 대한 기억만은 잃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현재와는 다른 미래 사회에서도 기억을 편집하든, 로봇이 되든 강렬한 혈연 본능만은 각인되고 재생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세상엔 낭만 문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이과도 존재한다. 별을 찬양하기보다 별의 성분을 분석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이토록 경외로운 감정이 그저 뇌 속 신경전달물질이 만드는 생리현상이라고 덤덤히 설명한다. 문란한 생활을 하던 수컷 들쥐들에게 애착 호르몬 옥시토신을 주입하니, 부인·자녀들과 다정하게 놀아주는 가정적인 쥐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 역시 같은 실험을 통해 가까운 대상에게 더욱 애착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다. 셰익스피어와 바그너와 도니체티가 절절히 노래하던 마법 같은 ‘사랑의 묘약’이 ‘옥시토신 스프레이’라는 유혹·친목 상품으로 상용화된 지 오래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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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기능이 사실이라면 이제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침마다 옥시토신을 흡입하고 출근하는 직장은 얼마나 신나고 흥분된 공간일까. 안 보여도 열 받고 보여도 짜증나는 남편이나, 화내도 무섭고 상냥하면 더 무섭던 부인이 갑자기 가슴 떨리는 존재로 거듭날지도 모른다. 호감가는 이 곁에 다가가 슬쩍 스프레이만 분사하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전 국민이 정기적인 흡입을 하고, 정치인들과 범죄자들은 용량을 더 늘리는 법안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아쉬운 것은 이토록 놀라운 효능물질을 발견했음에도 세상은 유토피아에 한발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행복상품을 대량으로 생산·공급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학자들은 다시 알려준다. 특정한 게임을 했을 때 옥시토신을 흡입한 이들은 같은 팀의 사람들에게 더 우호적이고 기부도 잘하지만, 그렇지 않은 외부자에겐 더 공격적으로 처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네덜란드 학자들의 연구도 비슷하다. 동굴 속 구멍에 빠진 대원 한 명을 구하려면 팀원 6명이 모두 위험해지는 상황을 제시한다. 구멍에 빠진 사람의 이름을 네덜란드식 이름과 아랍식 이름으로 알려주었을 때, 옥시토신 흡입자는 같은 국적의 대원에 대한 애착을 25% 정도 더 보였다. 이 말은 다른 국적의 대원에게 더 큰 편견을 보인다는 이야기다.

AI마저 흔들리게 만들 ‘모성애’나 ‘가족애’에 대한 신앙 같은 믿음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애착강화 물질이 동시에 편향성 물질이 되듯, 자녀에 대한 과잉집착은 오히려 천성적으로 애착·공감 유전자가 없는 반사회 성향 행위자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마더>이고, <일타 스캔들>의 부모들이다. 유난한 정의와 헌신을 강조하는 정치·종교집단이 분쟁과 폭력의 대표 아이콘이 되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치유의 언어로 뭉친 집단이 은근한 배타성을 보이고, 지독한 사랑이 가스라이팅이 되는 이유도 유사할 것이다.

신경과학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 능력과 이상심리의 기제까지 많은 것을 밝혀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이 확대될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듯, 인간에 대해 알아갈수록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진다. 실험 결과처럼 가치요소는 동시에 위험요소로 기능할 수 있으며, 진화된 모든 생명체에는 “오늘. 여기. 내가 아는 정당성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만 속단할 수 없는 생존과 공존에 필요한 기능과 미덕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어서다.

▼ 박선화 한신대 교수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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