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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우영우’의 계향심은 왜 그리 이악스러웠나···북한 여성을 통해 바라본 분단[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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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 시절 ‘노동영웅’ 길확실 통한 전쟁 후 여성 노동 연구 등

북한 여성 150여명 인터뷰…작가적 상상력으로 서사화

탈북민·조선족·자이니치 등 다양한 삶과 심리 입체적으로 담아

식민·분단·가부장제 등 ‘한반도 여성’의 공통 모순을 찾아내다

경향신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탈북 여성 계향심.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김성경 지음|창비|256쪽|1만8000원

지난해 화제가 됐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한 탈북자 ‘계향심’은 인상 깊은 캐릭터였다. 국경을 건너 ‘썩어지게’ 고생해 번 돈을 브로커에게 가로채인 계향심은 돈을 되찾기 위해 가정집에 각목과 벽돌을 들고 침입한다.

강도·상해죄를 저질렀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다. 변호사들에게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 말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숨어 지냈지만 뒤늦게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수를 한다. 계향심은 강한 모성애를 지닌 호탕한 탈북자 캐릭터로 드라마의 신스틸러가 됐다.

계향심은 극중 재미를 위해 설정된 캐릭터만은 아니다. 실제 탈북 여성들의 모습이 캐릭터 안에 녹아들었다. 북한 여성들은 국경을 넘어 가족과 자식을 먹여살리겠다는 강한 모성애로 갖은 고생을 감수한다. 그렇게 번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이악스럽게(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득바득하는 태도)’ 폭력을 쓰는 것도 마다않는다. ‘이악스러움’은 북한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엔 계향심을 닮은 수많은 여성들이 나온다. 우리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거리가 먼 여성들이다. 탈북 여성·조선족·재일조선인(자이니치) 등으로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지만 식민과 전쟁, 분단의 역사 속에서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 이들이다.

저자는 150명이 넘는 북한 사람을 심층 인터뷰해 북한 여성의 인생의 굴곡과 마음 속 깊은 곳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뉴스에 나오는 탈북자, 말투로 짐작하는 조선족 저임금 노동자의 평면적 모습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그들의 생을 흔들고 비튼 역사적 상처들을 짚어보면서 우리 역시 식민과 전쟁, 분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깨닫는다. 저자는 북조선 여성을 만나고 연구하며 ‘자신의 위치성’을 깨달은 이야기도 솔직히 털어놓으며 “나의 연구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었음을 고백”한다.

‘노동영웅’ 길확실···여성주의적 독해로 재해석
개인의 행복과 집단주의 사이에서 내적 갈등
“국가 실패는 노동자에게 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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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린 ‘천리마 시대’ 청년들의 모습 . 정면으로 보며 양 손을 들어올린 사람이 ‘노동영웅’ 길확실이다. 노동신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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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의 사진.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은 ‘노동영웅’ 길확실이 일했던 곳이다. 노동신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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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북한 매체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소개한 여성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그녀들은 북조선체제가 구현하고자 하는 인민의 전형이지만 내가 만난 인터뷰 속 인물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며 인터뷰 데이터에 기초해 이들의 경험과 감정을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서사화했다. 이들은 선전을 위한 도구에서 구체적 욕망과 내적 갈등을 지닌 인물로 되살아난다.

길확실은 천리마 시대(1956~1972)를 대표하는 노동영웅이다.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은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대중영웅’으로 재현된 인물이다. 그가 쓴 <천리마 작업반장의 수기>는 1961년 직업동맹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2020년 4월27일엔 <천리마시대의 녀성영웅들 : 인간개조의 선구자 길확실>이란 기록 영화가 방영된다.

본명은 길건실이다. 건실은 일제에 땅과 집을 빼앗기고 화전민으로 삶을 근근히 이어오던 부모 사이에서 1937년 태어났다. 해방 이후 건실의 가족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토지개혁과 북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이 제정돼 건실의 가족에게 땅이 생기고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토지를 분배받았다. 변화의 달뜬 분위기는 전쟁으로 사그라든다. 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빠는 인민군으로 차출되고,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로 배치되어 고된 노동을 한다. “갑작스레 노동자의 삶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조선 여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버지는 전사하고 오빠는 부상병이 되어 돌아온다. “아버지의 죽음은 살림집과 배급표”가 되었고, 오빠 몫으로 배급품이 나왔다.

북한은 전후 재건을 위해 전인민적 증산 운동인 ‘천리마 운동’을 벌인다. 건실은 ‘노동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북한 섬유공업에서 중요한 공장인 평양제사공장에 배치돼 작업반장이 된다. 작업량과 출근율이 떨어지던 ‘문제 작업장’의 생산량을 140%까지 끌어올리며 모범을 보인 건실은 1960년 3월8일 국제부녀절(세계 여성의 날)에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저자는 ‘노동영웅’ 이면에 자리한 건실의 내적 갈등을 “여성주의적 독해를 통해 재해석”한다.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의 괴리, 노동자들 사이에 생기는 생산량에 따른 위계와 서열, 개인의 개성과 ‘집단주의’의 갈등 속에서 고뇌한다. 고된 노동을 강요한 것을 두고 “국가의 실패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회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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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여인이 중국 지린성 양지 지역 내 시장에서 여우 모피 등, 북한 상품을 팔고 있다. 조중 접경지대에선 북한과 중국의 밀무역이 성행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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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이후 여성들이 시장에서 경제활동 나서
뇌물로 얽힌 경제···“북조선 시장은 무법천지”
‘돈주’로 큰 돈 모은 여성도···화폐개혁으로 하루아침에 ‘빈 손’


만자와 혜원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먹고살기 위해 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대표한다.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군’으로 인민들은 ‘각자도생’하게 된다. 노임과 배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가족들은 여성들이 시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살아간다. ‘머리가 트인’ 이들에게 위기는 기회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사회주의 혁명과 당의 지침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을 ‘석끼’(고지식한 사람)으로 부를 정도로 세상이 급변했다.

장사는 국가 통제와 규율을 어겨야만 가능했기에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법일꾼(보안서와 보위부에서 일하는 이들)들이 남편감으로 인기가 높았다. 장사를 위해선 뇌물이 필수였다. “북한의 시장화는 장사를 하는 신흥 중산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장사꾼과 국가 공무원들의 결탁이 결정적 역할” 했으며 “암시장부터 시작된 북조선 시장은 무법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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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함북 회령시 판잣집 사이로 난 도로 한 귀퉁이에 장마당이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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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자는 중국 옷을 수입해 시장에 팔고, 딸 혜원은 더 큰 사업을 구상한다. 법일꾼과 결혼해 국가 연유공급소에서 기름을 빼돌려 시장에 팔아 큰 돈을 번다. 북한 정부는 시장이 지나치게 커지는 걸 두고볼 수 없었다. 2009년 화폐개혁을 단행, 시장세력이 보유한 자본을 회수한다. 화폐 가치가 하루아침에 100분의 1로 하락해 돈이 휴지조각이 됐다. 좌절한 혜원은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남편의 직업을 활용해 큰 규모의 도매업을 하다가 화폐개혁으로 재산을 잃고 탈북한 혜원의 이야기는 저자가 만난 탈북 여성들의 공통된 경험이기도 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본격화된 시장화 과정에서 여성들의 경제행위가 두드러졌다. 남성들은 공식 경제에 배치됐지만, 이들의 노임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했다. 북한 여성의 ‘이악함’은 가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북한 여성들은 가부장제 틀 안에서 억압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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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중국 지린 성 옌밴 조선족 자치주 서시장 거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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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모성애로 ‘가부장제’ 통제받는 여성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우선시하는 여성들
“조선 여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니까”


2부에선 저자가 조·중 접경지역에서 만난 북한 여성과 조선족, 그리고 일본에서 만난 자이니치와 북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성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북에 남은 가족의 생활비, 장사 비용 등을 마련해 북으로 돌아갈 계획으로 중국으로 가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불법체류 신분인 이들은 숨어 지내며 식당 종업원, 보모·간병 같은 돌봄노동을 하거나 조선족 남자와 함께 살기도 한다. 유흥업소로 유입되는 이들도 상당수다. 북한에서나 중국에서나 극심한 성폭력에 노출된다. 이미 터를 잡은 북한 여성은 새롭게 유입되는 탈북 여성을 도우며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북한에서 당원까지 됐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탈북한 순영 할머니는 “우리 조선의 여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니까.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여기서 아바이들(조선족 남자)이랑 같이 사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여기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거니까”라고 말한다.

탈북 여성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해 번 돈을 북에 남은 자식에게 송금한다.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북에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있다. 대다수 북한 여성이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앞세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도 나온다.

미영은 남편과 딸을 위해 국경을 넘지만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자 ‘결혼장사’를 한다는 조선족 브로커를 만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조선족 남성과 결혼한다. 미영 역시 북한 여성에게 일자리를 소개하거나 결혼자리를 주선하며 수수료를 받다가,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보내는 중간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 공안의 수사가 시작되자 미영은 남편과 아들을 남기고 홀로 남한으로 향한다.

3부에선 저자가 영국 유학 시기 느낀 열등감, 소외감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서 출발해 자신이 북한 여성 삶에 매료된 이유에 대해 말한다. 서구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공부하면서 지식의 서구중심성, 젠더 차별이 자신에게도 작동함을 절감한 저자는 한반도를 탈식민주의와 젠더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는 방향으로 연구 주제를 잡아간다. 식민과 분단 구조에서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약자였던 북한 여성의 경험을 통해 분단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북조선 여성은 식민·젠더·계급 구조가 상호 교차하며 구축한 매트릭스 가장 하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의 경험 세계는 권력이 만들어내는 위계가 얼마나 다층적으로 작동하는지 폭로한다.”

저자는 북한 여성을 통해 한반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시작한다. 북한 여성들의 모습에서 “전복성과 해방성”을 발견하고 “가장 낮은 서열에서 자매애와 가족애를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경쟁적 신자유주의에서 사라진 가치와 감정이 복원되는 모습을 본다.

책은 북한 여성들의 삶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산문이기도 하며, 중국 접경지역과 일본에서 만난 조선족·자이니치·북한 여성들의 심층 인터뷰이자 여행기이기도 하다. 저자가 북한 여성들을 만나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고백이자, 서구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국 유학생이 자신의 인종적·젠더적 위치를 자각하고 그것을 다시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재배치하며 연구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성장담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이 책은 독자에게 “북한 연구의 절경”(정희진 이화여대 초빙교수)을 보여준다.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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