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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수로부인이 원했던 절벽의 꽃, 성적 욕망의 상징일까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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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불문학자 김정란의 ‘반독서’

역사적 사실보다 신화의 관점으로

수로 부인, 처용, 원효 등의 설화

고통받는 중생에게 전하는 신성함


한겨레

‘헌화가’의 배경이 되는 삼척시 남화산에 조성된 수로부인 헌화공원.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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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삼국유사

우리 민족의 신화적 원형을 찾아서

김정란 지음 l 한길사 l 2만7000원

시인이자 번역가,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김정란이 쓴 <꿈꾸는 삼국유사>는 신화를 읽는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삼국유사>를 기존의 여러 해석과 ‘다르게’ 읽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이 책의 말을 빌리면 신화 연구는 어느 정도 역사학이고, 어느 정도 사회학이며, 어느 정도 문학이고, 어느 정도 정치학이며, 어느 정도 종교학이고, 어느 정도 철학이며, 어느 정도 심리학인 동시에 어떤 접근으로도 신화는 완전하게 읽히지 않는다. 이 모든 방식의 읽기에 버텨내는 매우 특이한 담론이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삼국유사>인가. 일연의 <삼국유사>는 역사서라기보다 역사의 ‘나머지 일 또는 이야기’를 자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엄연한 ‘사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김정란은 <삼국유사>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의 관점에서 읽어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역사와 무관한 신화, 설화로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은 <삼국유사>에 대한 독법을 제시하는 기존의 여러 학계 논문들을 검토하고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해석까지를 전한 뒤, 새로운 길을 내어 독자를 이끈다. “거의 모든 설화에 대한 나의 독법은 기존의 독법들과 충돌했다”라는, ‘책을 내면서’의 문장대로다. 즉 이 책은 일종의 <삼국유사>를 읽지만 ‘반독서’를 지향하는데, 이 ‘반독서’(contre-lecture)에는 각주가 딸려 있다. “필자가 제안하고 명명한 것으로, 이미 이루어진 모든 독서에 의문을 품고 텍스트에서 대주체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지워내는 읽기다. 텍스트에 숨어 있는 시적 문맥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결과 악마화되거나 증발되거나 혹은 성적 대상화되는(성애적인 맥락에서만 읽혀온) 여성들을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수로부인 이야기도 그렇게 새롭게 해석되는 이야기 중 하나다. 기존 연구자들의 분석은 수로부인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신성해졌다”라는 것이지만, 이 글은 그녀가 “신성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라고 주장한다. 수로부인 설화를 두고 <삼국유사>에 묘사된 아름다움(“그 미모가 가히 견줄 자가 없었다”)을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연구, 수로부인 설화를 불교나 도교 설화로 보는 연구, 수로를 제의를 집행한 무당으로 보는 연구 등이 있다.

수로는 남편 순정공의 부임행차 도중에 꽃을 꺾어 바칠 자 누구냐고 말하는데, 김정란에 따르면 <삼국유사> 전체를 통틀어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여성은 여왕들 빼면 수로 말고는 없다.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꽃을 수로의 성적 욕망의 상징이라고 보고, 제의적 맥락으로 읽는 학자들은 꽃이 지혜를 상징한다고 읽는데, 김정란은 현대 무당들의 꿈 이야기를 채록하는 작업을 한 학자 안영희의 해석을 따른다. 수로 이야기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꽃’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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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표준영정(정탁영, 1984). 일연은 몽골 침략 아래 고통받던 민중에게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민족의 자긍심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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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에 근거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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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를 무당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미 존재하지만, 김정란의 해석으로는 무당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로가 일상적 질서를 벗어난 신성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 설화의 의미는 충분히 밝혀진다”. 게다가 수로부인 설화의 의미는 ‘해가’ 배경 설화에서 더 선명하게 읽히는데, 수로왕의 출현과 관련해 전해지는 ‘구지가’는 수로부인의 ‘해가’와 그 구조가 거의 똑같다. 남성인 수로왕이 여성인 수로부인으로 재등장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로는 원래 여신-여왕이었던 인물인데, 문헌설화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남신-남왕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을까.

처용 설화는 ‘한국문학을 통틀어 아마도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텍스트’다. 어학과 민속학, 역사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수많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 이 설화를 둘러싸고 어떤 해석학적 카오스가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는 것이다. 처용 설화가 연구자뿐 아니라 시인과 소설가들마저 매료시킨 이유가 문맥에 드러난 것과 다른 심층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리라는 가정 아래 김정란은 해석을 시작한다. 인문학적 근거를 갖춘 신화학적 읽기를. 의구심의 시작은 역신과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 용서한 처용의 ‘관대함’에 대한 것이다. “성적 일탈을 저지른(또는 강간당한) 아내와 역신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그 후 수백 년 동안 고려와 조선에서 사랑받는 신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관대한 용서의 덕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다면 어째서 이 땅의 사람들은 여성의 정조에 대해 그토록 가혹했는가?”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무려 1000여 가지에 이른다. 이 신화는 학대받는 주인공, 마술적 도움, 왕자와의 만남, 왕자와의 결혼을 그 공통 구조로 가지며, 신발(한 짝)과 반지, 황금사과 따기 등으로 여주인공의 정체성 확인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 이야기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들을 신화학을 중심에 두고 다시 읽으려는 시도는 이러한 원형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인 셈이다.

<꿈꾸는 삼국유사>는 원효 설화에 나타나는 ‘신발 한 짝’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맺는 구성이다. 원효 설화를 의상과 원효라는 두 성인이 진리에 다가가는 방식의 차이로 읽어내며, 원효의 관음이 “불쌍한 대중 속으로 내려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신적 존재”였으리라고 해석한다. 그의 관음은 세계의 아픔에 동참하는 자다. 낙산사 설화에서 원효에게 나타난 관음들이 모두 가난한 여성들의 모습을 한 것은 그래서다. 김정란은 신발 한 짝의 이야기로부터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호명한다. 더불어, 원효가 “여성으로 상징되는 버려진 것들, 못난 중생, 세계의 타자들”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대중은 원효를 설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 역할을 맡겼다고 보는 것이다.

신화를 신화답게 읽는 김정란의 독법이 <삼국유사> 새롭게 읽기를 가능케 한다. “신화를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되게 하는 힘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이다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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