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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성공과 실패, 그리고 선택[이재국의 우당탕탕]〈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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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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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어릴 때부터 딸에게 어떤 일을 대할 때 성공과 실패, 합격과 불합격보다는 선택과 또 다른 선택의 개념으로 가르쳤다. 9년 전 한 사립초등학교 추첨을 앞두고 나는 평소 뽑기 운이 좋은 내가 함께 가야 한다며 딸과 함께 참석했다. 검은 바구니 안에 손을 집어넣어서 파란 공을 뽑으면 당첨, 하얀 공을 뽑으면 탈락이었다. 파란 공을 뽑은 가족들은 이따금 환호성을 질렀고, 하얀 공을 뽑은 대부분의 엄마 아빠들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퇴장을 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 나는 합격을 바라며 눈을 감고 검은 바구니 안에서 공 하나를 꺼냈는데, 하얀 공이었다. 하얀 공을 딸에게 보여주며 “우린 ××초(공립) 합격이다! 합격!” 그렇게 소리 지르며 강당을 빠져나왔다.

딸은 아빠가 좋아하니까 좋은 건 줄 알고 “합격” 소리를 지르며 함께 따라 나왔다. 단지 집 가까이에 사립학교가 있어서 지원했을 뿐이고, 운으로 당첨자를 뽑는 이벤트에서 “탈락”이나 “불합격”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어린 딸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냥 하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합격이나 불합격 같은 시험대에 오를 일 없이 잘 지내왔는데 얼마 전 딸이 디자인 공모전에 응모를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지원자의 나이나 학력 등 아무런 제한이 없었고, 뭐, 운이 좋아서 입상을 한다면 좋은 추억이자 나중에 좋은 포트폴리오가 될 것 같다며 한번 도전해 보라고 용기를 줬다.

딸은 차근차근 자료조사를 하면서 열심히 준비를 했다. 나는 딸이 늦은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고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우고 반복하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물 한 잔 떠다 주거나, 퇴근길에 아이스크림 사다 주는 걸로 응원을 대신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작품으로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입상을 하지 못했다. 딸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고불고를 했다.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위로를 해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빠 봤잖아. 이건 말도 안 돼.”

차마 내 입에서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도 있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딸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고, 가능하면 상처받는 일 없이 곱게 키우고 싶었지만 그건 내 품 안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쓴맛은 앞으로 살다 보면 수없이 겪을 일이고,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이건 합격이나 불합격이 아니고 그냥 주최한 곳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작품을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누가 선택됐는지 발표 나면 같이 보자.” “이미 발표 다 났어.”

딸은 당선된 사람의 작품을 나에게 보여줬다. 이건 중학생이 따라갈 수 없는 퀄리티였다. “이번엔 연습했다 치고, 다음에 다시 도전해보자.” “아니, 안 할 거야. 난 이미 최선을 다했어. 난 재능이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음…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어.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자. 하지만 아빠 눈에는 우리 딸 작품이 1등이야!” 딸은 분한지 며칠 동안 냉랭한 표정으로 지내더니 나에게 다른 공모전의 정보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말대로 이번엔 선택되길 바라며 다시 도전!”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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