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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한국판 ‘동성애자라고 말하지 말라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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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등 회원들이 2021년 3월4일 오전 서울특별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교육청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 강력 촉구 기자회견'에서 성소수자 학생 보호와 지원을 위한 실질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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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최근 언론과 에스엔에스(SNS)에서 ‘황당 조례’ 혹은 ‘시대착오적 조례’로 떠들썩했던 서울시 조례안이 있다. 시의회에서 발의한 건 아니고 어느 시민단체가 제안한 조례안인데, 시의회 전문위원실에서 서울시교육청에 법안 검토를 요청하면서 그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례 이름은 ‘서울시 학교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 조례’다. 성과 생명, 윤리까지 좋은 말들이 모여있지만 내용은 해괴하기 짝이 없다. 제정 목적이 ‘학생, 교직원, 보호자가 성·생명윤리를 존중하는 학교 문화를 조성하여 학생이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추구하고 자율적 인격을 형성·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한다’고 했으나, 정작 본문에선 학생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소년은 보호대상으로만 두고, 부모에게 교사와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데 주안점이 있다. 부모의 자녀교육권은 다른 모든 교육당사자의 그것보다 원칙적으로 우위에 있고, 보호자에게는 학생의 성장 단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감독할 권리가 있다. 성교육을 실시할 경우 교육감과 학교의 장은 그 내용을 보호자에게 미리 알려줘야 하고, 연령에 적합하게 성교육 과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보면, 이 조례는 지난해 3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만들어진 악명높은 ‘교육에 있어 부모 권리법’을 떠오르게 한다.

일명 ‘동성애자라고 말하지 말라 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현재 유력한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로 떠오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의 작품이다. 그는 동성애 차별이라는 비판에 “법안에 동성애자라는 단어는 없다”며 모함이라고 부인하지만, 법안 내용을 보면 차라리 동성애자라고 지칭하는 편이 낫다. 법 조문은 상당히 모호한데,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전략으로 보인다.

우선 학교 교직원 또는 제3자가 성적 지향 또는 성별 정체성에 관해 교실에서 설명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 또 유치원에서 3학년까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며, 4학년 이상의 경우엔 주가 정한 표준에 따라 학생들 나이 또는 발달 수준에 적합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만약 교사가 이런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모는 교육당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실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조항이 불명확하다. 교실 밖은 괜찮다는 건가? 성소수자 인물이 등장하는 학습자료도 쓰면 안된다는 건가? 역사 속 동성애자들을 지워야 하나? 만약 동성애자 급우를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교사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학생이 트랜스젠더는 잘못 태어난 사람이냐고 질문할 때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 동성애자 부모를 둔 학생이 미술 시간에 가족 그림을 그렸다면 교사는 어떤 반응도 보여선 안되는 건가?

설명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는 모호한 규정과 부모가 교육당국을 고소를 할 수 있다는 확실한 규정은, 학교와 교사가 어떤 행동과 말이 부모를 거스르게 할지 눈치 보게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아동과 청소년이 경험하게 하는 것을 막는다. 공교육이 부모 입맛에 맞춰진다는 건 비극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시민성에 관한 논의는 어디서 가능할까.

미국 플로리다와 서울의 거리는 꽤 멀지만, 지금 정치사회 풍경만 보면 꽤 가까운 한동네 같다. 이번에 논란이 된 조례안이 시민단체를 표방하는 사실상 종교단체가 만들어 의회에 제출한 조례안이란 사실은 우려를 더욱 키운다. 시의원이야 임기와 지역구라는 한계라도 있지만, 정치세력화를 꿈꾸는 종교계는 전국에서 쉼 없이 움직일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라고 압력이 거세다. 이 와중에 미국에서 들려오는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담은 법 제정 소식은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한다. 이 조례가 시대착오적인 이유는 구시대적이어서라기보다 따라가지 않아야 할 미래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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