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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육체만을 편드는 세상, 나는 이 세상이 무척 낯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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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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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책을 읽거나 쓰는 것은 무언가를 낳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닐는지요. 무언가를, 싱싱하고 새로운 그 무언가를 낳으려면 그 태(胎)가 젊어야겠지요. 또한 태의 젊음과 더불어 가임(可姙) 욕구도 지니고 있어야겠지요. 내가 좋아하는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신은 항시 그런 욕구를 지니고 계신다고, 결코 늙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계신다고,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분만용 침대에 누워 계신다’고 갈파했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대학 시절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만났습니다. 카뮈와 사르트르, 키르케고르와 카프카 같은 실존주의자들에게 경도되어 있던 내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만남으로써, 뿌연 안갯속 같은 삶에 대한 회의로 가득한 사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그의 글들은 언제나 늙거나 쇠하지도 않는 신처럼 팔팔한 영적 젊음의 향기를 갈무리하고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글들에 매혹당하는 까닭입니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 일컫지 않았지만, 그의 글들에는 시적 향취가 묻어 있었고, 그의 심오한 사상은 바다보다 깊고 광활하여 나는 내 영적 욕구의 닻을 그에게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나는 문학과 종교의 경계 사이에서 그네 뛰듯 살아왔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종교적 관념들을 문학의 언어로 형상화하려고 노력했고, 나를 매혹시키는 문학적 이미지들에 종교의 숨결을 불어넣으려 몸부림쳐 왔습니다. 이러한 나의 지향에 엑카르트나 아빌라의 테레사, 성 프란체스코 같은 영적 대가의 저작들은 시시때때로 큰 힘을 보태주었지요. 나는 사유의 폭이 넓지 못하고 깊이가 얕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몰입할 수 없었고, 또한 사유의 폭과 깊이를 지니더라도 그 표현 양식이 단조로운 그런 작품들에도 빠져들 수 없었습니다. 물론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상가들의 경우,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지요. 문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으뜸 가르침(종교)과 맞닿아 있다면, 그것을 표현하려 할 때, 문학적 양식을 채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삶의 추(錘)가 종교적 관심으로 기울 때는 문학에서 멀어질 때도 있었지요.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는 시를 짓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시를 짓는 것만큼 나쁜 것도 없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내장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씻는 것과 같다.

한겨레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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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이 말처럼 나 역시 시를 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 즉 존재의 궁극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지상의 표현 양식인 문학의 언어는 힘을 잃고 맙니다. 궁극의 존재와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언어는 죽게 마련이고, 시는 ‘이별에서 싹트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루미의 이런 정직한 고백에 매혹되었고, 최근에는 침묵을 한껏 품은 그의 시를 종종 읽고 있습니다. 그는 ‘백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노래할 시를 읊을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그것 역시 자기 안에 현존하는 ‘신성한 원본’(神)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갈망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육체만을 편드는 이 세상, 요즘 들어, 나는 이 세상이 무척 낯섭니다. 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둔세주의자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살며 그나마 ‘신성한 원본(原本)’을 간직할 수 있는 방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내가 문학적 표현 양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문학인들 영원하겠습니까. 문학이 아니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그런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요, 그것마저도 벗어버려야 할 집착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종교 역시 지상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것도 불변, 불멸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아침에도 늦은 햇살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폭설로 덮인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산이라는 책’을 읽으러 말입니다. 서가에 꽂힌 책만 책이겠습니까. 하여간 털 장화를 신고 천천히 미끄러운 산길을 올라가는데, 사람의 발자국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적설 20㎝쯤은 쌓인 듯싶은 눈길, 짐승들의 발자국만 무수히 찍혀 있었습니다. 고라니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산 중턱쯤 올라 소나무 군락으로 들어섰는데, 소나무들 사이로 무수한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한겨레

고진하 목사.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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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의 길, 그 길 위에 인간의 길도 포개져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산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이런 문자를 여읜 책이 있기에 문자로 된 책이 살아 꿈틀거리는 책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이테를 더할수록 문자를 여읜 책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문자를 여읜 책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또한 문자로 된 책 때문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며 읽어온 책 가운데는 위에서 말한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잘랄루딘 루미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 외에도 <죄와 벌>의 도스토옙스키, <희랍인 조르바>와 <성 프란체스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작가들의 책입니다. 지금도 인도의 고전인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 같은 사상서들에는 내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타의 경전들처럼 존재의 궁극의 문제에 천착하기에 딱딱하고 읽기는 쉽지 않지만, 문학적 이미지와 상징이 풍부하여 나의 상상력을 졸아들지 않게 해주며, 언어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오래 지니도록 부추겨줍니다.

하여간 이런 고전들은 문자로 된 것이지만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사유의 바다로 안내해 줍니다. 문자가 사람을 부자유하게 하는 덫이 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의 돛이 되는 그런 책이 좋습니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내 문학적 행위가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걸 늘 명심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세상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문학적 행위가 사람들에게 외향적 가치에서 내향적 가치로 안내하는 영적 이정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세계에 속하는 적이 없이, 언제나 우리를 저 너머, 다른 땅으로, 다른 하늘로, 다른 진실로 데려가는’ 시의 본질을 지상의 동무들과 늘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바람 역시 내가 읽어온 숱한 책을 통해 지니게 된 것처럼 내가 쓰는 글들도 그런 자극을 나누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창조의 여명은 우리가 이런 의식의 젊음을 사랑하고 잘 가꾸어나갈 때 순간순간 밝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 고진하(목사·시인·원주 불편당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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