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8 (목)

[이용균의 초속 11.2㎞] J라서 더 피로한 걸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새해를 맞고 한 달이 지났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은 ‘피로’다. 어쩌면 MBTI ‘제이(J)’라서 더 피로한 건지도 모르겠다 싶은데, 나만 그런 건 아니다.

경향신문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주변이 온통 피로로 뒤덮였다. 2023년 미디어 전망을 꿰뚫는 단어도 ‘피로(Fatigue)’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2023년 전망에서 ‘구독 피로’를 언급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비대면 시대’ 동안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것저것 다 구독했는데, 이제 뭘 봐야 할지 고르는 것도 ‘피로’하다. 정리해야 하는데, 정리할 걸 선택하는 것도 ‘피로’하다. 정리 못하게 8부작씩 둘로 쪼개는 것도 피로하다. 그렇지 않니? 연진아. 감당할 수 있겠어? 차무식씨.

‘마블 피로도’라는 말도 등장했다. 디즈니플러스라는 OTT의 등장으로 마블 세계관이 확대되고, 해상도가 높아진 데다 OTT 예습-극장 관람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피로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2018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2시간 내내 싸우면서 도시를 파괴하는 히어로물만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벤져스 피로감’이 올 수 있으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페이즈4에 이르러 멀티버스로 확대되는 마블 세계관을 따라가는 건 진짜 피로한 일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비슷한 경로에 놓였다. 만나지 못하니까, 온라인에서도 관리가 필요했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찾아가 좋아요, 하트를 눌러주는 일이 피로하다. 단톡방도 피로하고, 밴드도 피로하다. 피로한 걸 생각하고 따지는 것도 피로하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웃기고 재미있는, 짧은 영상을 보기만 하면 되는 틱톡이 덜 피로해서 인기다.

‘피로’의 사전적 의미는 ‘과로로 정신이나 몸이 지쳐 힘듦, 또는 그런 상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의 명령에 따른 병리적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치료는커녕 더욱 중증이 됐다. 성과주의이자 능력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새로운 게 나오면 열심히 따라가야 한다. 소비가 곧 투자인 사회다.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싶은데, 또 새로운 게 나오면 다시 뒤로 밀린다. 따라잡다 지쳐서 뒤로 밀려나며 ‘피로’를 느낀다. 문제는 ‘피로’가 쉼을 통한 ‘회복’의 대상이 아니라 피로감을 주는 대상에 대한 ‘회피(Avoidance)’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2023년 전망에서 가장 우려한 것 역시 ‘피로’가 아니라 ‘회피’다. 우크라니아 전쟁은 끝날 것 같지 않고, 경제는 어려워지고, 자산이 줄어든다. 당장 솟구친 난방요금 고지서가 아니라 미래를 더 어렵게 만들 기후위기가 더 큰 문제다. 온통 어렵고 힘든 일뿐인데 이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양극단에서 서로를 향해 대치할 뿐이다. 2023년 정치는 사라지고, 오직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만 남았다. 그런데 ‘윤심’의 실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서 또 피로가 몰려온다.

그러니 열심히 뉴스를 읽어가며 스스로의 방법을 찾는 대신,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회피해 버린다. 민주주의의 적이 정치 혐오에 따른 ‘무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적극적 회피’다. 더 큰 위기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따르면 관용과 자제라는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가장 위험한 제도로 바뀔 수 있다. 최근 발표된 2023 에델만 신뢰 보고서에 따르면 27개 조사국 중 한국은 4개 공공 영역(정부, NGO, 기업, 언론) 신뢰도에서 단연 꼴찌(36%)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6%포인트 떨어져 하락폭이 가장 컸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각자도생을 위해 끝없이 의심해야 하는 ‘고도 피로사회’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박미경(금새록)은 하상수(유연석)에게 “토요일부터 퇴근을 기다리던 고질병, 월요병이 사라졌다. 얼른 보고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지긋지긋한 피로와 이에 따른 회피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랑’뿐일 것 같지만 <사랑의 이해>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은 쉽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우리는 또 피로하다. 피로한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피로하다. 이런 글 보게 해서, 피로하게 해서 미안해서 또 피로하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이럴 때일수록 보다 많은,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새해는 아직 열한 달이 남았고 피로에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저널리즘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더 잘 읽히는 친절한 뉴스를 위해 노력해야 할지니. 2023년 새해 결심은 그래서 ‘피꺾마’.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noda@kyunghyang.com

▶ 나는 뉴스를 얼마나 똑똑하게 볼까? NBTI 테스트
▶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 10시간 동안의 타임라인 공개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