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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피아니스트 백혜선 “난 알고보면 좌절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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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인생 에세이집 출간

한겨레

성공한 음악인의 표본으로 여겨져온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에세이집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펴냈다. 마스트 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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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는 정명훈 수상(1974년 2위) 이후 국내 피아니스트가 처음 거둔 최고의 성적표였다. 이듬해 서울대 음대에 역대 최연소(당시 만 29살) 교수로 임용됐다. 지금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며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아니스트 백혜선(58) 이야기다. 그는 ‘성공한 음악가의 표본’처럼 여겨져왔다. 그런 그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에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다산북스)란 제목을 붙였다. 지난 30일 간담회에서 그가 풀어낸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 의아스러운 책 제목이 과장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겪은 첫번째 좌절은 피아노가 아닌 수영에서였다. 백혜선은 피아노에 재능을 발휘하기에 앞서 ‘수영 천재’였다.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경상북도 신기록까지 세웠다. 하지만 서울 전지훈련에서 만난 ‘진정한 천재’ 앞에서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천재의 꽁무니를 멀찍이서 뒤쫓는 비참함’. 그날 그가 느꼈던 희미한 좌절의 기억이다. 그 천재는 바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3개를 목에 건 최윤정 선수다. 그 최 선수가 지금은 파주에 있는 클래식 음악 전문 공간 ‘콩치노 콩크리트’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묘한 인연이다.

지난해 임윤찬의 우승으로 널리 알려진 밴 클라이번 콩쿠르도 그에겐 처참한 좌절로 각인돼 있다. 1993년 이 콩쿠르에 출전했지만 1차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1989년 윌리엄 카펠 콩쿠르 1위, 1990년 리즈 콩쿠르 5위,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4위를 기록했던 그에게 1차 탈락은 충격이었다. 더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신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이 스물여덟에 피아노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전화회사 영업직으로 취직했고, 매니저 승진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운명처럼 피아노 앞에 서게 된다. 스승 변화경의 끈덕진 권유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도전한 것이다. 마지막 출전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 이 콩쿠르에서 3위 입상. 이 결과는 그를 서울대 교수 자리로 안내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이혼까지 감수해야 했던 미국행이었다. “모든 사람이 서울대 교수가 되면 인생이 풀린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내 옷이 아닌 것 같았어요. 제 속에서는 자꾸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는 외침이 있었고, 한편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교수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안온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이것이 정녕 나의 삶인가 하고 느낄 때면 그 각성을 그대로 넘기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겨레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에세이집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펴냈다. 마스트 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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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 김선욱, 조성진, 손민수, 임윤찬. 60을 바라보는 그에게 최근 다시 한번 좌절을 안겨준 이들의 이름이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들이 한국 참가자를 경계할 정도예요. 힘과 재능, 배우는 속도가 놀라워요.” 하지만 아직은 쉽게 물러서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 늙어가는 연주자가 들려줄 수 있는 음악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젊고 창창한 연주자들의 힘과 기교를 따라가기 힘들겠지요. 다만, 관객들이 ‘저 사람의 음악은 뭔가 가슴을 울리게 한다’고 얘기하는 그런 연주를 오래 하고 싶어요.” 그에겐 롤모델이 있다.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그의 스승 러셀 셔면. 아흔셋의 노스승이 연주하는 리스트는 아직도 그를 울린다. 하긴, 올해 100살인 ‘보자르 트리오’의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도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국내 연주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4월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가 잡혔고, 지역을 돌며 순회공연도 펼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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