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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제주지법, 4·3 직권재심 재판 30명 모두에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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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대 사령관과 동명 이유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

‘일제→4·3→한국전쟁’ 거치며 아들 셋을 잃은 사연도


한겨레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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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을 잃었다. 큰아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갔다 죽었다. 둘째 아들은 4·3 때 차에 타라는 경찰 말에 차를 타고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아들은 한국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강원도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더 나올 눈물도 없었다.

일제강점과 4·3, 한국전쟁을 관통하면서 아들들을 차례로 잃은 어머니는 더는 흘릴 눈물도 없었다.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다 1978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이 남긴 자식, 손자에게 간간이 세 아들 이야기를 꺼냈으나, 속 시원히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런 세상이었다.

31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 둘째 아들의 재심 대리인으로 나온 이재옥(75·제주시 조천읍)씨의 가족사다. 이씨는 둘째 아들의 조카다. 이날 재판에선 4·3 당시 내란죄나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30명에 대한 재심이 진행됐다.

제주지방법원 4-1형사부(재판장 장찬수)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이씨는 “둘째 삼촌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씩 들은 정도”라고 했다. 이씨의 둘째 삼촌은 1949년 7월4일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뒤 행방불명됐다.

“할머니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들 셋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번 재판을 계기로 이런 억울한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재판에서는 4·3 때 무장대 사령관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뒤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희생자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아버지 이름이 다른 사람과 같아서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까지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조천초등학교에 주둔한 군부대와 경찰지서에 여러 번 끌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신원 확인을 통해 이름은 같지만 생년월일이 다르다고 해서 풀려났습니다.”

김순두(79·제주시 조천읍)씨가 말을 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김달삼. 우연히 당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 김달삼과 이름이 같았다. 4·3 무장봉기를 일으킨 이른바 ‘제주도인민유격대 사령관’인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이다.

그러나 김씨의 아버지는 ‘김달삼’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불려 다녔다. “군부대에서 조사를 받아서 신원이 확인돼 나왔는데 사흘 뒤 200여m 떨어진 지서에서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조천에서 나고 자란 조천사람입니다.”

김씨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경찰이 초등학교로 나와서 차를 타라고 했다. 김씨가 4살 때였다. 아버지 ‘김달삼’은 1948년 12월28일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 엽서를 받아보고 읽다가 울면서 쓰러졌습니다. 저는 왜 우는가 하면서도 어머니가 우니까 따라 울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져 형무소 문이 열렸다. 고향에서 함께 끌려가 수형 생활을 하던 그의 아버지와 다른 2명이 제주도로 가겠다며 남쪽으로 걷고 걸었다. 일행 3명 가운데 한 명이 배탈이 났다며 잠깐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운 뒤 돌아왔다. 그 사이 그의 아버지와 다른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기다리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났고, 뒤에서 지프가 달려오다 멈췄다. 지프 운전자가 “어디를 가느냐”고 묻더니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줬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고향 조천으로 와서 이씨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그분에게 “어떻게 오셨느냐? 우리 아기 아빠는 같이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형님이 오지 않았습니까? 형님이 집에 온 줄 알고 찾아왔다”고 했다. 목포에서 잠깐 헤어진 사이 그의 아버지와 또 다른 일행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어머니는 울다가 기절했다.

김씨는 “1960년대 후반에야 아버지 사망신고를 했다. 4·3으로 행방불명된 사실이 기록에 남으면 자식들 출셋길이 막힌다고 해서 면사무소 직원과 상의해 아파서 돌아가신 거로 신고했다”며 “다 크고 나서야 통곡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씨는 “있는 죄를 없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없는 죄를 있다고 하면 안 된다”며 재판부에 “현명한 판단을 해 달라”고 했다.

재판부는 이날 30명 모두에게 유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방청석에서는 무죄가 확정되자 박수로 화답했다.

장 재판장은 재판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4·3은 갈 길이 멉니다. 새로운 과제도 많습니다. 완전한 진실규명과 유족들의 명예회복이 중요합니다. 4·3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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