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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연인이라면 은밀히 공유하는 '이것'...범죄 수사 새 지평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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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해 6월 전북의 한 살인 사건 현장에서 과학수사대 관계자들이 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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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등의 연구팀은 시카고 대학 기숙사 건물 5~8층을 석 달 동안 구석구석 조사했다.

기숙사에 거주하는 37명의 자원자 방에서 침대 시트와 욕실 문손잡이, 창문틀, 책상 위에서 면봉으로 시료를 취했다. 신발 등 개인 소지품과 손바닥 등 피부도 닦아냈다.

범죄 수사를 하듯이 연구팀은 이렇게 28개 방과 공용 공간에서 시료를 채취, 그 속에 든 미생물의 유전자를 분석했다.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조사였다.

마이크로바이옴이란 사람 몸이나 환경에 서식하는 다양한 미생물 군집(세균·바이러스·곰팡이 등), 즉 미생물 덩어리를 말한다.

사람과 함께 진화해온 인체 마이크로바이옴은 소화·면역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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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군집인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을 설명하는 그림. [자료: 미국 국립인간유전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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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기숙사를 조사한 연구팀은 거주자 피부와 방에서 각각 채취한 마이크로바이옴이 뚜렷한 연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정 방의 마이크로바이옴 조사 결과만 봐도 누가 그 방에 거주하는지를 대조해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행위 때 미생물 주고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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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몸 곳곳에서 발견되는 마이크로바이옴. [자료: 미국 국립환경과학연구소]


지난 2014년 호주 머독대학 연구팀은 '수사 유전학(Investigative Genetics)' 저널에 7명의 지원자(남성 3명과 여성 4명)의 머리카락과 음모(陰毛)에 있는 미생물의 DNA를 분석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머리카락에는 약 50종, 남성과 여성 음모에는 70종 이상의 미생물이 있었고, 사람마다 특이한 마이크로바이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인 관계인 남녀의 음모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미생물이 나왔다. 이들은 전날 성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이는 성관계를 통해 외부 미생물을 교환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성폭행 사건의 경우 미생물이 증거로 법의학 분석에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마이크로바이옴 분석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어떤 종류의 미생물들이, 어떤 비율로 분포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사람의 소화관·피부·구강·호흡기 등 각 신체 부위에서 발견되는데, 신체 부위마다 미생물 종류나 구성이 다르다.



사람마다 미생물 구성 다른 점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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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바이옴을 이용한 과학수사. [자료: Applied and Environmental Microbiolog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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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제 사람의 신체 부위, 나아가서 개인마다 마이크로바이옴의 구성이 다르다는 점을 착안, 이를 과학수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사건 현장에 무심코 남긴 미생물 덩어리 마이크로바이옴을 추적, 범인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사람의 지문이나 DNA로 범인을 찾아내고,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범인을 특정하거나, 범행이 일어난 시간을 파악하는 데 마이크로바이옴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고 목격자 진술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스위스 취리히대학의 취리히 법의학연구소 나타샤 아오라 박사 등은 최근 '응용·환경 미생물학(AEM)' 국제 저널에 과학수사에 마이크로바이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현재까지는 마이크로바이옴을 구성하는 미생물 중에서도 세균(bacteria) 유전자 분석이 대부분이지만, 향후 마이크로바이옴 분석이 곰팡이나 고세균(Archaea)까지 범위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일란성 쌍둥이까지도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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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어 장 내에 들어있는 마이크로바이옴 분석 결과. [자료: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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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DNA 분석은 짧은 연쇄 반복(short tandem repeat, STR)을 활용한다.

DNA 특정 부위에 2~6개 염기쌍인 STR이 몇 번 반복해서 나타나느냐를 개인에 대한 고유한 'DNA 지문'으로 활용한다.

마이크로바이옴분석에서는 리보솜 RNA(16S rRNA) 유전자처럼 특정 유전자의 특정 부위(마커)만을 증폭, 어떤 세균 종류가 있는지 분석하는 방법을 쓴다.

전체 미생물 유전자를 무작위로 조각 낸 다음 전체 유전자를 다 분석하는 방법도 있다.

수백 종의 미생물이 든 마이크로바이옴 분석이 가능한 것은 차세대 염기서열 방법 덕분이다.

구체적인 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시료에서 수백 가지 세균 DNA를 추출하고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과정이 대체로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끝난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사람의 몸에서 직접 채취한 시료 외에도 체액·혈흔·타액 등 사건 현장 '얼룩'에 남아있는 것, 신발에 묻어온 흙, 양말에 붙어있던 것도 활용할 수도 있다.

마이크로바이옴이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활용,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특정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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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 표피를 채취해 현미경으로 확대하니 크고 작은 세균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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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람 DNA 분석은 일란성 쌍둥이를 구분하지 못한 데 비해 마이크로바이옴을 활용하면 구분이 가능하다. 사는 장소가 다르다면 일란성 쌍둥이도 마이크로바이옴이 다르기 때문.

기존의 과학수사 기법으로 해결 못 하던 것까지 해결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금까지 네덜란드에서는 마이크로바이옴 분석 결과가 사람 DNA 증거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법정에 증거 자료로 제출된 사례가 2건이 있다.



실제 활용하려면 추가 연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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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1층 DNA 감정실. DNA 시료 분석기에 넣기 위해 증폭된 DNA시료를 담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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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많은 연구 결과와 사례를 모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고 스위스 연구팀은 지적했다.

또, 시료 채취 등 절차와 분석방법을 표준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료에서 채집한 마이크로바이옴과 용의자에서 채취한 마이크로바이옴이 일치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를 계산하는 방법도 정립해야 한다.

스위스 연구팀은 "마이크로바이옴에 기반을 둔 법의학 조사는 특히 체액 등의 분석, 범인의 확인, 사건 발생 시간 등과 같은 응용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며 "기존 법의학 틀 내에서 대체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수사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당장은 어렵지만, 국제 공동연구 등을 통해 많은 데이터가 쌓인다면, 머지않아 마이크로바이옴 분석 결과가 지문이나 사람 DNA처럼 당당하게 증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곤충·꽃가루도 범인 잡는 데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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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의 꽃가루. 꽃가루도 범죄 수사에 활용될 수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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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법의학 중에는 곤충 법의학이나 식물 법의학도 있다.

곤충 법의학은 사망 후 여러 곤충이 어떤 순서로 시체에 접근하고, 시체 부패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곤충이 시체에 알을 낳는지, 곤충 알이 얼마 후에 부화하는지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사망시간 등을 특정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시신에 생긴 구더기도 사망시간 추정에 사용된다.

모기의 피에서 사람의 DNA를 찾아내 범인을 잡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2008년 핀란드에서는 도난당한 뒤 버려진 차 안에서 모기를 발견, 용의자의 유전자를 확보해 구속한 사례도 있다.

식물 법의학에서는 사건 현장에서 묻혀온 특이한 식물의 꽃가루나 씨앗 열매 등으로 범인을 특정하기도 한다.

유기된 시신에서 꽃가루를 찾아내 실제 살인이 벌어진 장소를 찾아낼 수도 있다.

실종 사건에서는 살인 용의자의 자동차나 도구에서 꽃가루를 채취·분석해 살해된 장소를 추정하고, 거기에 숨겨진 시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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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와 관련 내용을 다룬 도서들. 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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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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