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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신주백의 사연史淵] 한반도, 지정학의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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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림1> 프랑스인 조지 비고가 1887년 2월15일자 잡지 토베(TOBAE)에 실은 캐리커처.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이라는 물고기를 낚으려 하고 있고, 러시아 역시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조지 비고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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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역동적 변화 속 대한제국은 지정학의 족쇄에 걸려 소멸당했다
지금 다시 문명사적 전환이 진행 중인데, 지난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탐구하는 자성은 필요하다
분단이란 현실과 접목해 한반도를 지정학의 힘으로 바꿀 수 있게 전략적 목표와 방안을 찾는 상상력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46년 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급속히 편입되었다. 새로운 질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치, 제도, 국제관계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표준에 강하게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열강의 외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때마침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위정척사파의 반외세론과 정반대인 개화의 길로 조금씩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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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 역사학자


하지만 개화의 길은 이때부터 청일전쟁 때까지 큰 장애물에 막혀 있었다.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국정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1885년 4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도 그중 하나였다.

■ 거문도 사건, 한반도 문제의 첫 세계화

거문도 사건 후 조선 정부는 만국공법에 어긋난다며 외교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은 조선을 무시하고 톈진(天津)의 직예총독 이훙장(李鴻章)과 교섭했고, 그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당사자인 조선이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 간 협상의 대상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거문도 사건은 열강의 세계 경영 전략 때문에 조선이 휘둘린 첫 사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 팬제에서 영국군이 훈련한 현지인 부대를 궤멸시키자, 영국이 동해의 러시아 해군을 견제하는 맞대응으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선과 무관한 이유인 것이다. 양측은 9월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고,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거문도 사건은 조선이 열강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는 곳인데도 갈등의 현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울의 러시아공사관 무관조차, 처음 열강들은 조선이 놀랍도록 부유한 나라라고 추측했지만, 개항 이후 그 ‘추측을 산산이 부숴’ 놓는 현실을 확인하고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 들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러시아와 영국의 입장처럼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인 전략 목적을 꿈꾸는 나라는 달랐다. 거문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1887년 2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조지 비고는 이미 그러한 국제 현실을 진단했다.(그림1) 잡지 토베(TOBAE) 창간호에 실린 캐리커처는 청과 일본이 조선을 낚시질하고 러시아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림 속의 상상은 7년이 지나 청일전쟁으로 현실이 되었다.

■ 한반도 문제의 역동적 중층화

일본은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하던 청을 전쟁으로 밀어냈지만 만주와 조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가 ‘극동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 랴오둥 반도를 일본이 조차한다는 청과 일본의 합의사항을 철회시켰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렇듯 삼국간섭 때 러시아 쪽에 영국과 미국이 아닌 프랑스와 독일이 가담했다. 이때 그들이 조선 및 청과 무관한 이유로 가담했음도 꼭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러시아가 국경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에 대결적이었지만 청 대외무역의 65%를 차지했으므로 정국이 불안정해지는 현상 변경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삼국간섭에 반응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청에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는 데다 동아시아 정책을 적극 내세우지 않았을 때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1898년에서야 하와이부터 필리핀을 잇는 동아시아 진출 루트를 확보하고 문호개방, 기회균등, 영토보전을 내걸었다.

반면 러시아는 거문도 사건 때 영국과 타협하며 조선 진출에 적극적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모색한 정책이 1891년 착공한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이었다. 러시아는 철도 완공과 만주 진출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랴오둥 반도를 반환해 준 대가로 청에서 치타-하얼빈-우수리스크를 연결하는 중동철도, 곧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 부설권을 받아낼 정도였다.

프랑스는 급속하게 성장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독일의 서부국경과 맞대고 있어 독일의 동부국경과 마주한 러시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경쟁에서 횡단정책을 펴며 종단정책의 영국과도 경쟁하고 있어 같이하기 어려웠다. 독일 역시 동부국경의 안정이 필요한 데다 청의 영토 일부를 얻어 해군기지를 설치할 계산이었다. 처음 청에 거절당했지만 훗날 얻은 땅이 우리에게 익숙한 맥주 생산지인 칭다오 일대다. 또 발칸 반도와 서아시아에서 경쟁하고 있는 영국과 같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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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 한반도 문제, 두 질서에서 소외되다

청일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만이 한반도의 정치 군사적 문제에 관심을 드러냈다. 두 나라는 일본의 만한교환론이나 만한일체론과 여기에 대응했던 러시아의 한반도 중립화론이나 만한분리론처럼 한반도 문제와 만주 문제를 한 세트로 취급했다. 대한제국은 미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을 매개로 중립화 외교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들 관계는 결국 전쟁으로 정리되었다.

러일전쟁 때까지 크게 두 가지 질서가 작동했다. 세계 최강 영국은 19세기 말 시점에서 아프리카, 발칸,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열강과 경쟁했다. 식민지인의 저항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난 보어전쟁(1899~1902)은 이겨도 본전인 싸움에 영국군 50만여명이란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반대편의 동북아에까지 막대한 군사력을 동시에 투입해 남하하는 러시아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문도 점령 실패도 불편한 현실을 가중시켰다.

영국은 강대국들과 경쟁하며 식민지와 이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글로벌전략을 추구했다. 지역차원의 집단안전전략은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의 여파를 지역에 한정하는 국지화 정책이었다. 그래서 동북아에서 선택한 파트너가 일본이었다. 영국이 일본 외교의 숙원인 불평등조약 개정에 가장 먼저 응했다. 두 차례의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견제하며 동북아에서 전략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일본은 동맹을 바탕으로 중립화론을 무시하고 만한일체론을 밀어붙이며 러시아와 대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대결적 관계는 만주와 조선에 한정되었다. 의화단 운동을 제압한 11개 국가가 1901년 청과 베이징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땅에서 지배 공조 체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그림2) 열강들은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베이징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군대를 주둔시키고 제국 지배 공조 체제라는 다자 질서를 구축해 중국 문제에 안정적으로 관여했다. 일본은 이 체제에 참가함으로써 동북아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새로운 체제는 산해관 바깥의 만주에서까지 확실히 작동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체제와 관계없는 주변부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와 소외된 존재감을 자력으로 변경할 전략과 힘이 없었다. 러일전쟁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일어났고, 그 와중에도 제국 지배 공조 체제는 흔들지 않았다.

이렇듯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역동적 변화는 열강이 그들만의 안정된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만의 리그 바깥에 위치한 대한제국은 지정학의 족쇄에 걸려 소멸당했다. 전통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실패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지금 또다시 문명사적 전환이 진행 중이다. 역사에 지름길은 없다지만, 최소한 지난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탐구하는 반성적인 성찰은 필요하다. 그래서 분단이란 현실과 접목해 한반도를 지정학의 힘으로 바꿀 수 있게 전략적 목표와 방안을 찾는 상상력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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