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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서소문 포럼] 땅따먹기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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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지난 설 연휴 무심코 유튜브를 뒤적이다 낯익은 듯한 모습에 눈길이 갔다. 두 형제가 방에 큼지막한 도화지를 펴 놓고 각자 귀퉁이에 작은 반원을 그려 자기 구역을 표시한다. 이어 손끝으로 병뚜껑(말)을 쳐서 영역 밖으로 내보냈다가 세 번 만에 출발지로 되튕긴다. 그렇게 귀환에 성공해 말이 지나간 길을 펜으로 죽 긋기만 하면 그 안쪽은 자기 땅 차지가 된다. 놀이터만 흙바닥에서 종이로 바뀌었을 뿐 영락없는 ‘땅따먹기’ 놀이다.

추위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놀던 게 족히 수십 년은 됐는데 이렇게 명맥을 잇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 연원을 알 길은 없지만, 땅이 전부이던 농경민족의 토지 소유욕이 놀이로 구현돼 대대로 전래했다는 게 통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유입된 왜색 문화라며 경원시하는 부류도 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말을 너무 세게 튕겼다가는 헛심만 쓴 꼴이 될 수 있어 과욕은 금물이라는 가르침도 은연중 내포한다.

놀이에서 풍기는 탐욕적 냄새 탓일까. 땅따먹기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지나친 소유욕이 빚어내는 허상을 꼬집는 소재로도 곧잘 쓰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침탈에서부터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행태, 졸부의 망국적 부동산 투기에 이르기까지. 시인 강희복은 동명의 시(2014)에서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지구에/ 선을 그어 놓고/ 침을 바르며/ 내 땅이니 네 땅이니/ 그리고 몇 평이니 하면서/ 땅따먹기 하고 있다/ 아,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짓인가’라며 앞뒤 안 가리고 땅따먹기에 돌진하는 세태를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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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5일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계자들이 투표지를 분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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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속성을 따지고 보면 땅따먹기와 도긴개긴 아닌가. 저마다 깃발이 오르기만을 기다렸다가 앞다퉈 말을 타고 달려나가 험지든 길지든 표밭을 갈고 다져 자기만의 텃밭을 일구려 용을 쓰니 말이다. 다만, 그 과정은 정정당당해야 하고 반칙이 용인돼선 안 된다. 상대를 악마화해 극한 대결적 구도로 몰아가서도 안 된다. 경쟁이 끝나고 난 후의 승복과 협치, 관용의 싹을 자르는 치명적 과오가 되기에 그렇다.



오늘이 선거구 획정 인구 산정일

'소선거구제 개편' 회의론 여전

낡은 정치와 헤어질 결단 필요해

게임의 룰을 정하는 첫 단추 역시 땅을 나누는 일, 선거구 획정이다. 기본 잣대는 인구다. 선거일 전 15개월이 속하는 달의 마지막 날 주민등록표 조사로 산정한다. 내년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월 31일(오늘)이 바로 그 기준일이다. 이날 인구 등을 토대로 오는 4월 10일 전까지 줄 긋기 작업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 이전투구로 기한을 넘긴 게 다반사였다. 법 조항은 사문화한 지 오래다. 그만큼 땅 가르기는 이해 당사자의 사활이 걸린 복잡한 문제다.

올해는 벽두부터 초대형 변수가 스며들었다.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 현행 소선거구제 자체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급부상했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명절 밥상머리에서 가족, 친지와 정치 얘기는 삼가라는 게 불문율이라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김진표 국회의장까지 가세한 선거구제 개편안은 설 밥상을 제법 오르내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닻을 올린 소선거구제는 당시 독재 종식의 대의를 위해 소구된 측면이 있다. 그 후 35년. 시대 변화를 거듭하면서 이젠 한계 상황에 직면한 듯하다. ‘올 오아 낫씽’(all-or-nothing)식 승자 독식주의는 많은 유권자의 표를 사표로 만들었다. 지역주의 구도는 심화하고, 거대 양당 독과점 체제는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극심한 양극화와 대결의 정치로 타협과 절충을 통한 민주적 합의 도출은 무력화했다. 정치 불신은 임계점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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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회가 지난 19일 국회에서 개최한 전문가 공청회.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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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의원들이 초당적 개혁 모임을 발족하고, 보수·진보 시민사회단체가 이례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정치 개혁을 촉구하는 등 변화의 추동력은 움트고 있다. 그런데도 저변에는 여전히 회의론이 팽배한 게 현실이다. 한 의원은 사석에서 “소선거구제 개편은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어 어차피 안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지난 19일 전문가 공청회에선 국회의원 숫자부터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불쑥 나왔다고 한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서로의 이해관계를 ‘무지의 베일’ 아래 묻어두는 결단 없이는 개혁의 물꼬가 트일 리 만무하다. 우리네 민초들은 잊은 듯하면서도 분수 모르는 ‘땅따먹기’엔 어김없이 통렬한 질책을 가했다. ‘네 이놈들!/ 그게 어디 네 땅이냐 내 땅이지! (중략) 종일 빼앗은 땅/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재덕 시집 『땅따먹기』 2021) 어쩌다 마주친 두 형제의 땅따먹기 놀이는 비록 하찮아 뵈도 ‘이 땅은 본디 누구의 땅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상기시킨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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