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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6공 황태자' 예산 막아선 죄...결국 총선 공천서 배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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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7〉 ‘6공 황태자’ 예산을 막다



중앙일보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영혼이 없는 공무원.’ 15년 전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에 국정홍보처 간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공무원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로 한동안 자주 오르내렸다. 공무원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맞춰 일하는 건 정당하다. 하지만 부당한 지시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공무원 한 명의 올바른 소신이 국가 정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공무원도 스스로 영혼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91년 노태우 정부 때다.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씨가 체육청소년부(나중에 문화체육부로 통합) 장관으로 있었다. 나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에서 교육문화체육 예산담당관(과장급)을 맡았다. 담당 부처에는 체육청소년부도 포함됐다.

그 무렵 박철언 장관의 위세는 엄청났다. 그는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그 후 소련·중국 등 공산권과 수교하는 북방정책과 남북 비밀대화를 주도하며 사실상 정권의 2인자로 통했다.



박철언, 청소년 조직화 예산 요구

“한국판 유겐트 안 돼” 소신 피력

부총리가 노 대통령에 보고하자

“당사자와 상의하라” 책임 회피

국장·실장 모두 “나는 모르겠다”

중앙일보

1991년 1월 14일 노태우 대통령이 경제안정 대책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각규 민주자유당 정책위 의장, 노재봉 총리 서리, 노 대통령, 이승윤 경제부총리. 최 의장은 같은 해 2월 개각에서 경제부총리에 선임됐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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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체육청소년부가 요청한 예산안이 경제기획원으로 넘어왔다. 세부 내용을 검토하다 이상한 사업을 발견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청소년회관과 훈련장을 짓는 계획이었다. 그 숫자가 약 3000개나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모든 읍면동에 하나씩 짓는다고 했다. 각 시군구에 상위 조직을 만드는 구상도 있었다. 방과후학교처럼 공교육 체계와 연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밖에서 별도의 청소년 조직을 구성해 집중 훈련을 시키려고 했다.

보면 볼수록 이해가 안 되는 사업이었다. 말로만 듣던 히틀러 시대 유겐트(나치 독일의 청소년 조직)가 떠올랐다. 아직 사고력이 성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관리해 일찌감치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박철언 전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도 민주계를 주축으로 내가 한국판 ‘히틀러 유겐트’를 만들려 했다고 맹비난했다”고 적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런 사업을 그냥 놔둘 순 없었다. 단지 금액을 깎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심의 대상에도 올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안 되는 이유를 자세히 정리해 A국장한테 가져갔다. 그는 “나는 모르겠으니 변 과장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예산실장에게도 가져갔다. 그도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반응이 이해는 됐다. 워낙 폭발력이 큰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박 장관이 중점 추진하는 사업을 막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하는 분위기였다.

예산 편성 시기가 되면 예산실 일과는 ‘나인 투 일레븐’이 보통이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도 퇴근할까 말까 했다. 체육청소년부 담당 실장은 새벽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다.”(변양균) “이거 안 하면 저는 죽습니다.”(체육청소년부 실장) 그는 낮에도 매일 같이 사무실로 찾아와 나를 달달 볶았다. 그렇게 집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부총리 유임되며 고향 강릉 출마 무산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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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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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요한 사안을 나 혼자 결정할 순 없었다. 비서실에 경제부총리 면담 시간을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비서실장이 “무슨 사안이냐”고 물어서 대략 내용을 전해줬다. 며칠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총리실로 바로 올라갔다.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마침 밖으로 나가려다 나와 마주쳤다. 내가 말했다. “꼭 보고 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최 부총리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부드러운 성품의 최 부총리는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었다. 부총리가 국·실장을 건너뛰고 직접 과장을 상대해 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내 설명을 쭉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대통령하고 담판해야 할 사안이구먼.” 최 부총리는 청와대에 연락해 노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과장이 하는 말을 듣고 부총리가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얼마 뒤 대통령 면담 시간이 잡히자 최 부총리가 나에게 지시했다. “자네 의견을 길게 말고 A4지 두 장으로 요약해 주게.” 나는 저녁 늦게까지 초안을 작성해 장관실에 팩스로 보냈다. 최 부총리는 “잘 적었네. 글자 한두 개만 고치면 되겠어”라며 흡족해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고 최 부총리가 노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나는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휴대전화도, 무선호출기(삐삐)도 없던 시절이다. 오후 7시쯤인가 최 부총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첫마디부터 깜짝 놀랐다. “노태우는 대통령이 아니야.” 그러면서 “자세한 얘기는 내일 사무실에서 하자”고 했다.

다음날 최 부총리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최 부총리의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결정을 미루며 박 장관과 상의하라고 했다고 한다. 최 부총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국의 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별도로 보고할 때는 결정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문제가 있으니까 보고를 하는 건데 당사자와 상의하라는 게 말이 되나.”

고심 끝에 최 부총리가 나름의 묘안을 냈다. “완전히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겠어. 지방양여금으로 하면 어때.” 중앙정부가 돈을 주면 각 지방자치단체가 알아서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면 이런 사업은 잘 진행되지 않는다. 속임수라고 하긴 뭐하지만 예산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알아채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해 말 개각이 있었는데 최 부총리는 유임됐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최 부총리는 고향인 강원도 강릉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88년 총선에서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한 차례 당선했다. 그런데 부총리 유임으로 어쩔 수 없이 92년 총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나는 최 부총리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 때문에 박 장관의 미움을 받아 총선 공천을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최 부총리는 김영삼 정부 때인 95년 강원지사 선거에서 야당(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나와 압도적 표차로 당선했다.

골프장 예약도 업무, 부끄러운 관행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나는 노태우 정부 후기에는 예산정책과장,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예산총괄과장을 맡았다. 내가 속한 경제기획원 예산실은 부처 내부와 외부에서 온갖 민원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가장 골치 아픈 민원은 골프장 예약이었다. 그 시절 골프장은 회원권이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인허가권을 가진 기관에서 요청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나는 매주 7~10건의 골프장 예약을 확보하는 일을 했다. 국방부·건설부·국세청 등 각 부처에서 일주일에 한 건씩 이른바 ‘상납’을 받았다.

토요일 오전도 근무했기 때문에 민원하는 사람들은 일요일 예약을 가장 선호했다. 장소와 시간이 좋은 건 제일 힘센 사람이 가져갔다. 누구 하나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장소가 별로다, 시간이 왜 이러냐” 하는 불평만 잔뜩 들었다. 정말 귀찮은 일이었지만 안 하겠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뒤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나로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전두환 정부 후반인 86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경제기획원 물가조정과장으로 미국과의 통상 문제를 협상하는 팀에 들어갔다. 그때 가장 민감한 협상 품목은 담배였다. 그전까지는 ‘양담배’라고 해서 외국산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 소지한 것도 단속 대상이었다. 우리 담배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국의 담배 시장 개방 압력은 갈수록 세졌다.

우리 협상팀이 애쓴 덕분에 담배 수입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조금 더 양보하라”고 했다. 너무 화가 났지만 실무자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 대통령의 친인척이 미국 담배회사의 로비를 받았다는 말도 돌았다. “나라도 피우지 말자.”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덕분에 열여섯 고교 시절부터 피웠던 담배를 끊게 됐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보람찬 일도 있지만 아쉽고 후회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과거엔 관행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도 많았다. 오늘도 책임감을 갖고 공직 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내 경험이 작은 참고가 되길 바란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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