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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힘 없는 이들에겐 요원한 검찰의 ‘한 줄짜리 의견서’[기자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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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중앙지검의 모습. /한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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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사는 80대 농민 오경대씨는 이복 맏형에게 속아 1960년대 납북됐다 귀환한 뒤 다른 가족의 월북을 도운 혐의로 15년 동안 복역했다가 2020년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53년 만에야 간첩 누명을 벗은 것이다. 법원은 국가가 오씨에게 18억여원의 형사보상금을 지급하라는 결정도 내렸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오씨는 고인이 된 형의 재심도 지난해 3월 법원에 청구했다. 형 경무씨는 북한에 끌려가 사상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실을 자수했다 사형에 처해졌다. 경대씨처럼 경무씨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체포,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를 당한 정황이 있다.


☞ ‘간첩 누명’ 53년 만에 벗은 제주 농민…“새 영혼을 받았다”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011262128015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조병구)는 지난 9일 심문기일을 열었다. 오경대씨 변호인에 따르면 담당 검사는 재판부가 의견을 요청하자 “의견이 없다”고만 했다. 형사소송법상 재판부는 재심 청구와 관련해 청구자와 상대방(검찰)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19일 서울중앙지검에 담당 검사가 재심 청구와 관련해 의견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담당 검사는 다음날 재판부에 ‘한 줄짜리’ 의견서를 제출했다. “위 재심 청구는 인용함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유 : 불법구금 의식할만한 사정 있으므로.”

검찰이 한 줄짜리 의견서를 낸 것은 재심이 청구된 시점(지난해 3월)에서 10개월, 심문기일이 열리고 열흘이 지난 뒤였다. 공교롭게도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의견서를 낸 모양새가 됐다.

오씨 가족은 간첩 누명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아들은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경찰도, 사업도 할 수가 없다며 이민을 떠났다. 그런 오씨 가족에게 재심 청구는 “영혼을 얻는 일”과 같다. 그러나 ‘영혼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검찰의 한 줄짜리 의견서조차 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오씨 뿐만이 아니다.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였던 고 장천식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사건을 자녀가 재심을 청구한 사건에서도 강릉지청은 8개월째 아무런 의견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해 대검 국감 때 이른바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수사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들, 권위주의 정권 이전의 사건들까지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국가가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재심을 통해서 바로잡도록 지시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검찰 일선에서 재심 청구에 반응하는 속도가 더딘 것은 정치적 주목도가 떨어져서인지, 총장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인지 궁금하다.


☞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 224건의 기록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2/covered224/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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