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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법원 허리' 엘리트 판사들 연이은 퇴직…"이건 잘못됐다"[e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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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판사 퇴직 못막는 현시스템 개선 요구 거세져

업무는 가중되는데 처우는 제자리…"처우 개선해야"

대형로펌 취업 '바늘구멍'…핵심보직자만 선별채용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퇴직하는 분들은 각 기수들 중 가장 우수한 분들입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도 이게 맞는 걸까요?”

한 고등법원 판사는 27일 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법원 퇴직자들에 대해 이 같이 평가했다. 이날 공개된 고등법원 퇴직 법관은 16명이다. 이중 고위법관인 최인규 광주고법 부장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15명은 법원 내 허리에 위치한 고법판사였다.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 선발된 인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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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에게 임명장 수여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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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별로 보면 고법판사(부장판사) 9년 차인 사법연수원 27기 김용하 고법판사부터, 지난해 고법판사로 보임한 사법연수원 36기 김도현 고법판사까지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다음 달 발표될 지방법원 인사에서도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재판장 등 핵심 보직을 경험한 다수 부장판사들의 퇴직이 예정돼 있다.

문제는 양보다 질이다. 이번에 퇴임하는 판사 중 다수가 동기 법관 중 법원 내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인사들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주요 로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몇 년 간 법원 내 우수 인재 유출에 대한 법원 내부의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를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다수 판사들은 이보다는 열악한 처우를 근본원인으로 꼽는다.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열악한 처우가 근본원인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나 고법판사 중 소수만 보임하는, 일종의 법원 내 승진제도였다. 법원 내 엘리트 집단으로 분류되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법원 내 주요 보직을 맡으며 사법행정이나 고등법원 재판을 주도했다. 법원 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인선도 대부분 이들 차지였다.

고법부장 제도는 법원 내에서 판사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지만, 반대로 법관 사회에 ‘눈치보기’ 문화를 만들어 관료화를 촉진시켰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폐지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제도가 폐지되며 더 이상의 고법부장 승진은 사라졌다.

한 지방법원 단독 판사는 “고법부장 승진 제도가 긍정적 측면이 일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판사들 줄 세우기를 유발한다는 부정적 요인에 대한 법관 내 공감대가 더 강했다”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시스템이 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판사들의 법원 이탈 가속화의 배경으로는 과중한 업무 환경과 그에 맞지 않는 처우가 원인으로 꼽힌다. 민사소송에서의 전자소송 도입과 형사재판에서의 디지털 자료 증가 등의 원인으로 판사들의 업무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소송 건수가 증가하는 것은 물론, 사건 자체가 복잡해지며 과거에 비해 심리에 더 많은 시일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변 여건도 판사들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법원 내부에서도 ‘워라밸’(일과 생활의 양립) 문화가 확산되며 재판 업무를 보좌하는 법원공무원들을 중심으로 과거와 같이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사라졌다. 이 때문에 판사들로서도 심리해야 하는 재판 기일이 증가하고, 이는 연쇄적으로 재판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도권 지방법원 한 부장판사는 “과거엔 고법부장 승진, 더 나아가서는 대법관, 헌법재판관 보임을 기대하며 희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대다수 판사들이 그 같은 자리에 연연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분위기”라며 “더욱이 실무관이나 배석판사들에게 업무를 위한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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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로펌, ‘선별 경험’ 판사만 선호…취업시장도 양극화

증가하는 업무부담 속에서도 판사들의 급여 수준은 거의 변동이 없다. 일반직 공무원들에게 비해선 비교적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지만, ‘대형로펌 취업’이라는 기회비용을 포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지적이다.

한 고법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와 급여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기회비용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급여를 인상할 필요는 있다”며 “급여만 올려도 퇴직자가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미국 연방법원 판사들의 급여는 22만 달러(약 2억7000만원)에 육박해 우리나라 판사들에 비해 훨씬 급여 수준이 높다.

판사들의 법원 이탈이 거세지며 대형 로펌 취업도 바늘구멍이 됐다. 과거 판사들이 퇴직을 앞두고 로펌을 선택해서 갔다면 현재는 주요 로펌이 퇴직하는 판사들에 대한 꼼꼼한 평판조회를 거쳐 소수 인원에 대해서만 채용을 제안하는 구조다.

일부 판사들의 경우 동료들에게 퇴직 의사를 밝힌 이후에도 대형 로펌에서의 채용 제안을 받지 못해 퇴직 의사를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 몇 해 전 퇴직 후 대형 로펌으로 옮긴 한 전직 부장판사는 “법관 외부 사정에 어두운 판사들 입장에선 퇴직의사를 밝히면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가 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현실은 극히 소수의 판사들에게만 그런 제의가 간다”고 전했다.

대형 로펌의 주요 영입 대상은 법원 내에서 최소 한 차례 검증이 된 ‘보직’ 법관들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이나 법원행정처, 서울행정법원 등 주요 파트 근무 경험이 있거나, 발탁 인사들인 고법판사들이 주요 대상이다.

실재 한 대형로펌에서 과거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주요 로펌 입장에선 ‘보직’을 거친 판사들이 영입 우선순위”라며 “보직을 거치지 않고 재판만 한 판사들의 경우 법원 내에서 ‘특별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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