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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치과마다 다른 충치 진단 개수,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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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9)

의료인문학으로 보는 질병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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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치료법도 달라진다. 게티이미지뱅크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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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가족이나 지인과 새해 인사를 나누며 한해의 건강을 기원하셨을 것 같다. 전공 탓에, 나는 새해 인사를 할 때마다 복잡한 기분에 빠져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탓이다. 정확히 말하면, 건강이란 이러이러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가 나에게 있지만, 아직 제대로 표현할 바를 찾지 못했다. 이미 책이나 논문을 통해 여러 번 써 보았음에도 그렇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올해도 건강하시길 빕니다”라는 말은 내게 참 까다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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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말하는 것이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여러 요인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을 말하기 위해선 적어도 병, 의료, 환자-의료인 관계를 다루어야 한다. 요새는 생활 습관과 환경도 살펴야 한다. 한편 이들 각각은 의료인문학의 중요한 탐구 주제다. 그러므로 당분간 이 칼럼에서 각 주제를 간단하게 살피고, 마지막으로 다시 건강으로 돌아오면 의료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에서 운을 길게 떼는 이유는 오랫동안 영화, 소설, 에세이 등에서 의료인문학적 내용을 뽑아 오던 이 칼럼이 잠깐이나마 개념들을 설명하는 글로 채워질 것에 대하여 미리 읽어 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함이다.

그럼 무엇부터 출발할까? 아무래도 병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건강하다”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병이 없다”는 것이기에, 그리고 의학이란 병과 싸우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쉬운 설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병을 구분하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나는 미국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의료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먼의 분류를 자주 따르는 편이다. 그는 병을 질병(disease), 질환(illness), 우환(sickness)으로 나누었다. 질병은 해부와 생리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생물학적 병을 가리킨다. 질환은 서사와 정서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병의 경험을 일컫는다. 우환은 사회와 정치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사회적 병을 말한다. 이 셋은 모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질병부터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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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mmHg인 사람은 우리나라에선 고혈압 전단계, 미국에선 고혈압 환자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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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정말로 있는가


우리는 질환에 익숙하다. 병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정서와 느낌을 겪었는지, 병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일상에선 당연하다. 질병은 병원과 의료인의 것이다. 의학이 질병에 붙인 이름을 우리는 받아 들고, 그것이 나를 괴롭힌 것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병마’(病魔), 즉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병이라는 존재가 있고, 우리는 그와 맞서 싸운다는 인식은 오래된, 보편적인 것이다.

하지만 질병이 실체를 지닌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며, 우리 몸에서 증식하여 다른 몸으로 건너가는 분자 덩어리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우리가 흔히 ‘코로나19’라고 부르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은 같지 않다. 전자는 후자의 주요 원인이고 후자는 인후통, 발열, 기침 등 일반적인 증상에서 시작하여 심한 경우 폐의 염증(폐렴)으로 사망에까지 이르는 증상군을 가리킨다.

이런 증상의 집합은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환자의 상황과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코로나19 감염증은 많은 사람에겐 감기이지만, 고령층에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질병이다. 그것을 가르는 조건은 연령과 면역 반응, 즉 바이러스의 특성이 아닌 환자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어떤 질병이 ‘실체’, 즉 고정된 본질이 있다는 생각은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의 변화 자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세포나 조직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이런 변화의 특정한 경향성은 특정한 장소에 구체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떤 변화를 질병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생긴다. 쉬운 예로 고혈압을 보자. 수축기 혈압(심장이 수축할 때의 혈압)이 140mmHg 이상이면 혈압이 높은 상태, 즉 고혈압이라고 부른다(이완기 혈압의 기준도 있지만, 값의 차이일 뿐이므로 생략하자). 수축기 혈압이 120에서 139mmHg 사이면 고혈압 전단계, 120mmHg 미만이면 정상이다. 이렇게 혈압의 수치를 가지고 몸 상태를 구분하는 이유는, 정상 혈압일 경우와 대비하여 고혈압인 경우 여러 허혈성 심질환이나 뇌졸중 등 심혈관계 질병 발생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120과 140이 기준선인가? 미국 질병관리청은 2017년 지침에 의거 고혈압의 기준선을 130mmHg로 바꾸었다. 수축기 혈압이 130mmHg 이상인 경우에도 심혈관계 질병 발생 위험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나 유럽은 아직 140mmHg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축기 혈압이 135mmHg인 사람은 우리나라에선 고혈압 전단계, 미국에선 고혈압 환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병 기준이란 의사들의 합의에 의한 것일 뿐, 질병이라고 애초부터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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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까, 의사들의 진단 결과일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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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과 구성주의의 논쟁


이런 이야기를 철학에선 실재론 대 구성주의 논쟁이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로 더 세분화할 수 있지만, 실재론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세계에 그대로 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예컨대 질병이라면, 우리가 질병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세계에 존재하고, 그것은 인식 또는 파악 가능한 어떤 무엇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다. 실재론에서 질병은 관찰자와 무관한 구체적 대상으로 저기에 있다. 다시 말해 누가 보더라도 질병은 질병이다.

한편 구성주의, 특히 사회 구성주의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세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 합의 또는 약속으로 그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질병이라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 또는 인상일 뿐이고, 그것에 ‘질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의 약속이지 질병의 본질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구성주의에서 질병은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가 보느냐에 따라 질병은 질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은 의학에서 실재론적 견해를 지닌다. 질병은 있고 ‘정말’ 있으며 그것은 누가 보아도 똑같다. 실재론적 견해에서 성장한 현대 과학기술의 수혜를 입은 의학 또한 질병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다. 문제는 앞서 간단하게 짚은 것처럼 이런 생각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른 분야를 말씀드리기보다, 내 의학적 토양인 치과의 사례를 가져와서 다시 검토해보자. 사람들은 치과마다 충치 진단 개수가 다르다는 것을 의아해한다. 충치는 입 안에 있는 구체적인 대상, 의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론적 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똑같은 충치이지,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충치 진행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치아 표면에서 생활하는 미생물 군집(치태라고 흔히 부르는 미생물과 음식물 찌꺼기의 결합체이다)이 음식물을 소화하여 분비하는 물질의 산성이 높아지면, 치아 표면을 구성하는 수산화인회석(hydroxyapatite)이 분해되기 시작한다. 한편 침이나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 치약에 들어있는 불소는 이런 산의 치아 분해를 막거나 저해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 미생물의 산 분비가 약하거나 구강 내 보호 기능이 그보다 강하면 치아는 변화를 겪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미생물 군집에서 산을 분비하는 세균이 득세하게 되면 치아 표면은 더 강한 농도의 산에 장시간 노출되게 되고, 결국 치아 표면은 녹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치아 표면이 어디까지 녹았을 때를 충치라고 이야기할 것인가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치아 표면의 변화까지 모두 충치라고 하면, 모든 사람의 모든 치아에는 충치가 있다. 표면이 많이 녹아서 떨어져 나간 다음, 즉 쉽게 말해 구멍이 난 다음에만 충치라고 말하면 충치를 가진 사람의 수는 줄어들겠지만 치료 적기를 놓치는 경우도 생긴다. 충치가 진행될 것이 보이는 사람에게 굳이 충치가 커져서 ‘확실해’진 다음에 치료하자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결국 충치가 무엇인지는 치료 적정선에 관한 치과의사의 합의에 달린 문제이며, 이렇게만 보면 구성주의적 견해가 맞는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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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잘라베르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자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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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틀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의학에서 구성주의는 환영받지 못하는데, 구성주의를 인정하면 아무렇게나 진단하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질병이 그저 특정 집단의 합의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그저 그들의 이익을 따르고 있을 뿐인 것 아닐까? 예컨대 충치 진단이 치과적 합의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치과의사들이 가장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정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심지어 그런 합의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왜 저들의 질병 구분만 옳고 내 질병 구분은 틀렸는가? 저들이 다수라고 하여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현실을 호도하고 심지어 잘못된 의학적 접근이 난립하는 결과를 가져와 많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히므로, 의학은 구성주의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질병에 대해, 실재론을 택하자니 현실과 맞지 않고 구성주의를 택하자니 해악이 발생하므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을 내놓으려면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보다 최근의 과학기술학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이 좋다. 오늘은 의학에서 실재론의 문제를 살피느라 글이 길어졌으므로, 적절한 설명을 내어 놓는 것은 다음 글의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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