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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떡국의 반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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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태양에서 나온 빛이 무량한 허공을 헤엄쳐 온 뒤 물체에 부딪혀서야 제 존재를 드러내듯 사람의 생각도 그 어떤 대상을 만나고서야 그 뜻이 생겨난다. 관찰해보면 이 세상의 바탕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직선은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거대한 원이나 타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저 곡선이 지향하는 바는 둥긂으로 이어지고, 결국 동그라미로 수렴된다. 둘러보면 둥글지 않은 게 없다. 열매는 동글동글 맺어지고, 수평선은 엎어놓은 함지박처럼 둥그스름하다. 모든 모난 돌들도 닳아지면서 구형을 닮아가는 중이다. 세상의 구조는 둥글고 세계의 힘은 원운동! 따라서 눈앞의 나무, 산, 구름, 달까지의 거리는 각각 지름일 것이라고 그간 여겨왔다.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뿐인데도 그리하였다. 과연 그럴까.

공간도 휜다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서 빛은 항상 직진한다. 빛의 저 곧고 일정한 빠르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고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나그네를 쉬게 하리라. 이런 성질 덕분에 세상은 두 배로 두둑해지고 그 이상으로 깊어진다. 사물을 본다는 건 빛의 작용에 말미암은 것인데, 직진하여 닿은 빛이 반사되어 나의 눈으로 들어오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만물의 근원인 빛이 채워주는 거리, 즉 모든 사물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지름이 아니고 실은 반지름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최근 확고해졌다. 그래야 그 너머가 있고 그다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의 반지름에 더해 그만큼의 반지름이 최소한 더 있어야 이 세계가 완성되는 것.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모든 사물은 원둘레의 어느 한 점이 아니라 고유한 원점이 되어 각자 중심이 된다. 둥근 지구의 한 표면과 맞물려 살아가는 동안 반지름에 대한 나의 견해가 이와 같게 되었다.

설날에는 몸을 둥글게 구부리는 동작을 자주 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곤충처럼 몸을 삼층으로 접는 절도 많이 한다. 그리고 떡국을 실컷 먹는다. 떡국만큼 동그라미가 많은 음식이 또 있을까. 국민학교 산수시간에 배우고 집어던진 반지름이라는 말이 이렇게 나에게 오묘해졌다. 동그란 떡국, 젓가락에 집히는 떡국떡까지의 반지름, 그 너머의 여러 반지름들을 가늠해 보면서 맛있게 여러 그릇 비웠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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