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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에버라드 칼럼] 전술핵 보유론이 유용한 대북 엄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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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1일 북한의 위협에 대해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가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은 미국의 지원을 받든, 자체 개발이든 한국의 전술핵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문제도 있다. 북한은 수년간 군사력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혼선을 야기해왔다. 이로 인해 상대국들은 북한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추측하며 최악 상황에 대비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번 전술핵 논쟁을 보는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에 전술핵이 있다고 믿고 그에 대비하도록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이 전술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북한이 확신하게 되면 관련한 북한의 계획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핵무기가 주한미군과 한국군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고, 한국이 재래식 무기에서 지닌 우위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북한이 발표한 핵무기 운용 교리 법제화를 보면 핵무기가 단순 억지력 차원이 아닌 선제공격 역량 확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에 전술핵이 없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윤 대통령 전술핵 언급 주목할만

보유론만으로도 북핵 억지 효과

미국의 사전동의 받는 것이 중요

중앙일보

에버라드 칼럼 삽화


전술핵을 보유한 한국은 북한 위협에 위협으로 맞설 수 있다. 또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북한 병력 집결지와 주요 군 자산을 파괴하는 대응을 펼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전술핵을 보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북한은 지금의 군사 전략 대부분을 폐기하거나 조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실제로 전술핵을 보유하느냐 여부보다는 북한이 그렇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북한의 유일하고 실질적인 군사력 우위라고 볼 수 있는 핵무기가 무력화된 상황에서는 한반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아마도 북한 정권의 패배이자 재앙으로 끝날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가능성이 매우 낮더라도 한국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만으로도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억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는 개연성이 높지 않더라도 북한에 리스크가 매우 큰 시나리오다. 만약 북한 입장에서 한국이 전술핵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90% 확신하지만, 나머지 10%는 불확실하다고 본다고 가정해보자. 북한이 정권의 명운을 나머지 10%에 걸 가능성은 크지 않다. 만약 전술핵 통제권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다고 북한이 판단하면 이는 곧 핵무기 사용 결정이 두 군데에서 이뤄진다는 의미이므로 북한은 더더욱 경계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북한을 속일 수 있을까.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북한 정권은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집단 망상에 빠진 지 오래다. 따라서 한국이 핵무기 보유를 준비하고 있다고 북한을 속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언론에 한국이 전술핵 도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흘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론의 추측성 보도만으로도 북한은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 간첩들은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엄포 작전(Campaign of bluff)’은 시작하기 전에 미국 동의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짜 도입하려 한다고 미국이 여기면 한·미 동맹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미리 합의하고 조율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에 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눈여겨볼 점은 지난 19일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미국 핵무기의 잠재적 한반도 배치’에 대한 결정 이전 단계에서 한·미의 공동 기획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을 때 미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부인도 거부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포 작전의 끝은 무엇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을 억지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무력 충돌 위협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의 속도를 높이게 되고, 추가 핵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은 핵무기 개발의 완성을 북한이 믿도록 해서 북한이 경솔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방지하면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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