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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주정완의 시선] 미분양 매입? 모럴 해저드부터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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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주정완 논설위원


“월가를 점령하라.” 10여년 전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 미국 뉴욕 월가에서 이런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대의 분노에 불을 붙인 건 금융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금융권에 쏟아부었다. 금융 시스템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금융회사 임직원들이 막대한 보너스를 챙겨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국민 세금으로 월가가 ‘돈 잔치’를 벌였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여당(공화당)에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 이듬해 1월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민주당)은 “부끄러운 일이자 무책임의 극치”라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그 사람들을 교도소에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도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실망한 대중이 거리로 나서면서 극심한 사회적 진통을 겪었다.



둔촌주공 등 미계약 물량 급증세

업계 요구에 정부가 사들일 태세

‘이익 사유화, 손실 공공화’ 안 돼

자유시장은 효율적이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면 정부가 부득이하게 개입할 수도 있다. 불이 났을 때 긴급히 현장에 출동해 불을 끄는 소방대원 같은 역할이다.

이때 정부가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공적자금)은 곧 국민의 세금 부담이다. 따라서 두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첫째는 시장의 실패를 초래한 당사자들의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이다. 자신은 전혀 손해 보지 않으면서 정부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둘째는 대주주와 경영진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사라지면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려는 분야가 있다. 미분양 주택 시장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통계를 보자. 지난해 11월 말 기준 전국의 미분양 주택은 5만8000가구였다. 4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특히 증가 속도가 가파른 게 심상치 않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1만1000가구나 늘었다. 정부가 위험 수위로 간주하는 6만 가구를 넘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개별 사업장에서도 불안한 소식이 잇따라 들려온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올림픽파크포레온)가 대표적이다. 사업자가 정확한 계약률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1순위 당첨자의 상당수가 계약을 포기했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마포더클래시에선 분양 물량의 절반 이상이 이른바 ‘줍줍(무순위 청약)’으로 나왔다. 그나마 서울의 역세권 아파트 단지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경기도나 인천에선 청약 접수 단계부터 대규모 미달을 면치 못하는 사업장이 속출한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판매자가 가격을 내리는 게 상식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때로는 판매자가 적자를 감수하기도 한다. 팔리지 않는 재고를 떠안는 것보다는 손해를 보고 파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양 시장은 거꾸로 간다. 미분양은 갈수록 쌓이는데 분양가는 오히려 올리는 모습이다. 건설업계는 원가 상승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청약자의 계산은 전혀 다르다. 신규 아파트를 분양할 때는 기존 아파트보다 싸게 내놔야 경쟁력이 있다. 이미 상당수 단지에서 기존 아파트 매매가가 최고가 대비 20~30% 떨어졌다. 일부에선 아파트 가격이 더 내려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니 청약시장 열기가 싸늘하게 식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미분양 주택 매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이달 초 국토부 업무보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다. 이미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동원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푸는 것과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시장의 실패로 인해 정말 부득이하다면 정부가 미분양 주택을 사줄 수도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사자의 철저한 자구 노력과 응분의 책임 추궁이다.

건설업계는 시장 분위기에 맞게 분양가를 최대한 내려 물건을 사줄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래도 안 되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비싼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물건이 안 팔린다고 하소연하는 건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잘 나갈 때는 한껏 이익을 누리면서 어려울 때는 공공에 손실을 떠넘기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공공화’는 용납될 수 없다. 월가의 돈 잔치를 막지 못했던 미국 정부의 실책이 국내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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