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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임지현의 역린] 토착왜구, 토착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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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태극기와 촛불로 갈라치는 한국의 여론몰이와 정치문화에 익숙해서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놀란다.

경향신문

임지현 서강대 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이던 지난 4월 공영방송 TVP에서 만든 ‘바르샤바의 우리 사람’이라는 다큐 필름 앞에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인공은 리버럴 야당의 전임 총리 도날드 투스크이고, 조연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다.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 투스크,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투스크, 베를린에서 메르켈과 포옹하고 양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투스크. 그래도 강조점은 푸틴과의 친선관계다.

필름의 해설자는 ‘러시아의 선전·선동’이라며 러시아 신문을 인용한다. “카친스키의 음모론에서 벗어나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강조”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과 상호주의 인정” 등등의 보도를 전하다가 ‘폴리티카’라는 러시아 신문의 기사 제목 “바르샤바의 우리 사람”을 클로즈업한다. 러시아 신문을 캡처한 화면은 투스크 당시 총리의 사진 이미지와 겹치면서 일관된 미장센을 강요한다.

필름은 다시 러시아의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 침공 당시 끔찍한 살상 장면을 비춘다. 조지아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고 지지한다는 반러시아 민족주의 가톨릭 ‘법과 정의당’ 지도자 카친스키의 연설이 이어진다. 또 푸틴의 면전에서 전체주의뿐 아니라 새로운 제국의 등장이 문제라는 카친스키의 연설이 강조된다.

2007년 당시 군비증강이 불필요하다는 투스크의 연설과 활짝 웃는 푸틴의 모습이 겹치는 몽타주 장면에 이어 현 정권 실세 카친스키가 러시아를 비판하는 연설 장면이 나온다.

화면 중간중간에는 ‘평론가’라는 정체불명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바르샤바의 우리 사람’의 정치생명에 못을 박는다. 거리에서 방담처럼 오고 가는 수준의 아마추어 말잔치가 영 불편하다.

폴란드에서 친러시아파나 친독일파는, 정도는 조금 약하지만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120년 넘게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점령 아래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스탈린의 소련과 나치 독일의 비밀 협약에 따라 다시 분할 점령 당해 총인구의 20%가 넘는 580여만명이 죽은 폴란드 입장에서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의 무게가 폴란드의 친러파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은 진짜 이해하기 어렵다. 친일파가 폴란드의 친러파보다 더 큰 욕으로 느껴지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를 동원하는 기억 정치의 문제이다.

일본 언론이 방일 중인 한국의 유력 정치인을 ‘서울의 우리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루었다고 상상해보라.

의사 파시즘에 가까운 극우 편향의 폴란드 가톨릭 민족주의 정권의 어처구니없는 선전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정적인 리버럴 진영을 친서방·친러시아 민족배반자로 몰아서 죽이겠다는 것이다. 낯익은 구도이다. 이방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의사 파시즘 극우 정권의 이 저질 ‘토착로구(露寇)’ 몰이는 한국의 자칭 진보 인사들이 펼치는 ‘토착왜구’ 놀이와 수상한 데칼코마니를 만들고 있다. 진영론에 빠져, ‘토착로구’는 문제지만 ‘토착왜구’는 훌륭하다고 강변하면 곤란하다.

대개 이런 식의 음모론자들은 ‘작은 물고기’들이 많다. 역사가 요동치는 폴란드 현대사에서 권력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념의 옷을 갈아입으며 더 거친 언어로 설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공산당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그들의 이력을 까보면 가관일 때가 많다.

민주화운동 진영이든 근대화의 주역이든 자기 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힘을 기를 때, ‘토착왜구’ 같은 저질 음모론은 입지가 좁아진다.

윤핵관이 문재인 정권을 친시진핑 사대주의 ‘토착한구(漢寇)’라고 비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대로 가면, 한국 정치는 서로 다른 외국을 숭배하는 ‘민족 배반자’들의 삼류 코미디 경연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다. 전 국회의원 이주일씨가 그립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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