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외국인이 던질 한 표가 이 나라 지도자를 결정한다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스윙 보트’의 투표지 한장

외국인 선거권 개정 논란

조선일보

영화 '스윙 보트'의 한 장면. 뉴멕시코주에 사는 버드 존슨에게 선거 시스템 오류로 재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버드의 표 한 장으로 뉴멕시코주의 승자가 판가름 나는 상황이다. /액티버스 엔터테인먼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사코에 사는 버드 존슨(케빈 코스트너). 친구들과 당구 치며 맥주 마시고 낚시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인 별 볼일 없는 남자다. 그런 버드가 하루아침에 미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초박빙으로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버드의 똑똑한 딸 몰리(매들린 캐럴)는 아빠를 투표장으로 보내려다 실패하자 몰래 아빠 이름으로 본인이 투표를 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전자투표기가 꺼지면서 버드의 표가 무효표 처리되었고, 뉴멕시코주 헌법에 따라 버드는 재투표를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선거가 너무도 박빙이라는 것. 버드의 표 한 장으로 뉴멕시코주의 승자가 결정될 판이다. 뉴멕시코의 선거인단 5명을 가져가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일자무식 주정뱅이 홀아비의 손에 미국 대통령을 결정할 힘이 주어지고 만 것이다. 재선을 노리는 현임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1′을 타고 깡촌으로 날아와 버드의 술친구 노릇을 한다. 일곱 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야당 후보는 버드의 취향에 맞춰 자신의 신념을 내팽개치는 TV 광고를 찍기 시작한다.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의 2008년 영화 <스윙 보트>의 내용이다.

민주국가에 살아가는 우리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참정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참정권에는 선거에 출마하거나 후보자에게 투표할 수 있는 선거권,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공무담임권, 국가의 중요 사안에 대해 직접 투표할 수 있는 국민투표권이 포함된다. 그중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참정권은 선거권이다. 오늘날 우리는 헌법에 따라 치러지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 민주주의라고 해서 반드시 ‘평등한’ 권리를 ‘모든’ 이들에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심지어 대혁명 직후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89년 7월 14일, 성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만 해도 프랑스의 신교도 남성들에게는 참정권뿐 아니라 직업 선택의 자유마저 없었다. 유대인이나 흑인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불과 3년 후인 1792년 8월 10일, 종복과 실업자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남자들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프랑스 혁명 전쟁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구체제 귀족들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에 반발한 혁명 정부는 4월과 7월에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문제는 프랑스군 장교들 또한 귀족이라는 것. 9000여 명 중 6000여 명이 외국으로 망명했다. 혁명 정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시 총동원 체제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총을 들고 싸워야만 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주는 거대한 전환은 전쟁의 산물이자 역사적 필연이었다.

민주주의 원리가 확산된 과정을 오직 전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가 린 헌트가 <인권의 발명>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듯,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을 통해 구체화된 인권 개념은 그 출발부터 자명성, 보편성, 평등성의 원리를 내재하고 있었다. 설명할 필요 없이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권리였기에 인권은 누구에게나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참정권은 사람이라면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자연권적 인권이 아니라 실정법상 국민의 권리다. 근대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처럼, 참정권의 확산 역시 전쟁과 떼어놓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호주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인에 대해서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민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상식적인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1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한 말이다. 여당은 이러한 기조에 발맞춰 공직선거법 개정에 나섰다. 현행법은 영주권 취득 후 3년이 경과한 외국인에게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한다. 개정안은 영주권 취득 후 5년 이상 국내에 지속적으로 거주한 외국인에 한해, 그 외국인이 타국 출신 영주권자에게 선거권을 주는 나라 사람일 때에만 우리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취지다.

야권에서는 이러한 법 개정 움직임을 ‘극우’ ‘인종주의’ ‘혐오 선동’ 등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2020년 같은 취지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을 때 문재인 정권은 “지역주민으로서 지역사회의 기초적인 정치 의사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주주의 보편성을 구현하려는 취지”라며 현행 제도를 옹호한 바 있기도 하다.

근본적인 지향에는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외국인, 특히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향한 배타적 감정을 극복하고 더 열린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지역 사회를 살아가는 납세자들이 정치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말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권을 시혜적·정책적 관점에서 외국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복지 혜택 취급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민자들이 계몽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세운 나라, 미국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영주권자에게 일체의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외국인이 귀화하여 미국 시민권과 선거권을 얻기 위해서는 “법이 요구할 경우 미국을 위하여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충성의 맹세’를 해야 한다. 미국이 극우 혐오 차별 국가란 말인가?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며 동맹이다. 반면, 현재 선거권 논란의 핵심인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편에서 우리와 싸웠던 나라다. 두 나라 모두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자국의 참정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외국인투표권은 선이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차별이라는 식의 조악한 인권 담론은 정치적 편가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적 맥락과 현실의 필요성을 고려한 깊은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갑자기 쏟아진 유명세에 취해 있던 버드는 투표를 앞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두 후보에게 국민들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아닌 온 국민을 위한 토론회를 가진 후 버드가 투표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스윙 보트>의 열린 결말이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피와 땀으로 쟁취했지만 그 소중함을 잊고 있는 투표용지 한 장,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미래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철학 전문위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