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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시사컬처]박찬욱과 톰 크루즈 그리고 식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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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연말이니 올해 영화들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최근 몇 년간 코로나19 때문에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들에 주도권을 내주었던 극장가가 조금이나마 활기를 되찾은 한해였다. 극장에 걸렸던 영화 중 최고작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꼽겠다. 장르적 재미와 예술적 상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연출자의 엄청난 장악력에 짓눌리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구현해 낸 박해일과 탕웨이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청룡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을 휩쓴 건 당연한 결과. 국내가 아닌 해외영화들까지 포함해도 올해 ‘헤어질 결심’을 넘어서는 영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개인적 평가와 취향을 기준으로.

그다음으로 꼽는 올해의 영화는 ‘탑건 : 매버릭’. 무려 36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었으나 영리하게도 긴 세월의 공백을 오히려 재료로 삼았다. 주연 배우 톰 크루즈 역시 고령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손색없었다. 누가 나에게 톰 크루즈가 역사상 최고의 배우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이 망설여지지만, 최고의 액션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이름을 꺼낼 것이다. 물론 톰 크루즈는 액션 외에도 로맨스와 막장 코미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영화에 몸을 던진 배우이자 제작자였다. 지금도 그 어떤 신인배우보다 더 열정적인 자세로, 문자 그대로 몸을 내던져가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언젠가 조종간을 놓을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고 말하는 탑건의 베테랑 조종사 ‘매버릭’은 실제 인물 톰 크루즈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올해 OTT 플랫폼에서 선보인 영화 중에서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이상이 없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란 돈 주고 극장까지 가서 볼 정도는 아닌 모니터 화면용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돈을 더 주고 극장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여러모로 생지옥이었던 1차 대전 당시 참호전을 독일 병사의 몸으로 경험하게 해주는데 몰입감이 대단하다. 흠이 있다면, 끔찍함도 지루함도 너무 실감 나게 느껴져 힘들다는 것. 역대 최고의 넷플릭스 영화로 꼽을 만하다.

위에서 말한 영화들은 소위 주류로 분류되는 작품들이고, 누적 관객 4만명이 채 되지 않는 영화도 한 편 붙여본다. 국내에서도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그 작품의 주연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다시 뭉친 신작 ‘본즈 앤 올’이다. 식인이라는 불편하고 비현실적인 소재 때문에 관객에게 외면받아 안타깝다. 극단적인 소재 안감에 혐오와 운명론 같은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이 수놓아져 있다. 영화를 흥미롭게 본 나조차도 독자님들께 자신 있게 권하지는 못하겠고, 끔찍한 장면을 잘 견디거나 즐기는 분들이라면 도전해보시길. 올해 가장 도발적인 영화로 선정한다.

한해를 정리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꼽아보기를 추천한다. 작품이 주었던 재미와 감동을 되새김할 수도 있고, 작품을 봤던 날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오던 길,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추억하며 극장 앞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던 그날이 생각난다. 열린 결말이 더 어울리는 이야기도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일어섰지. 이 이야기도 이쯤에서 뚝.

이재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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