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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만물상] ‘살찐 손가락’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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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일본 미즈호 증권에서 한 직원이 63만엔짜리 주식 1주를 파는 주문을 내다가 실수로 1엔에 63만주를 파는 주문으로 잘못 입력했다. 90초 만에 실수를 알아채고 주문을 취소했지만 그새 수만건의 주문이 체결됐다. 증권사는 주문을 책임지느라 4000억원대 손실을 봤다. 금융가에선 이런 실수를 팻 핑거(fat finger)라고 한다. 살찐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다 실수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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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에서도 팻 핑거 사고가 발생했다. 삼성증권이 우리사주 직원들에게 배당을 지급하다 ‘주당 1000원’을 ‘1000주’로 잘못 입력했다. 삼성증권 유령 주식 28억주, 110조원어치가 추가 발행된 꼴이었다. 직원 21명이 재빨리 손가락을 놀려 500만주를 팔아치웠다. 문제가 심각해졌다. 미국 증권사들은 거래 내용이 이상하면 자동으로 걸러내는 ‘리스크 서버’가 있는데 당시 한국 증권사들은 그런 안전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스마트폰 모바일 뱅킹이 활성화되면서 일반인도 팻 핑거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컴퓨터 자판 간격은 2㎝가량 되지만 휴대폰의 자판 간격은 0.5㎝도 안 된다. 축의금 10만원을 보낸다는 게 0을 하나 더 찍어 100만원을 보냈다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예금보험공사에서 ‘착오 송금 반환 지원 제도’를 운영할 정도다. 지금까지 2300여 건, 29억원 반환을 도와줬다고 한다. 팻 핑거 위험은 사생활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몇 년 전 한 대학생 커플이 학과 단톡방에 성관계 동영상을 올리는 실수를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팻 핑거 주체를 동물로까지 확장했다. 문 전 대통령이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사이코 패스’라고 비방한 인터넷 글에 ‘좋아요’를 눌러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문 전 대통령이 고양이 사진과 함께 “좋아요를 누르는 범인, 드디어 색출”이라는 글을 올렸다. 자신이 아니라 고양이가 눌렀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정말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 전 대통령 일로 웃어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경남 남해의 한 축협이 금리 10% 적금 10억원어치를 창구를 통해 판매하려다 직원이 실수로 몇 시간 동안 온라인 적금 가입을 들어오는 대로 받았다. 순식간에 1000억원 이상 자금이 몰렸다. 축협 측은 “직원 실수로 감당 못 할 예수금이 들어왔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해지해달라”고 읍소하는 메시지를 전 고객에게 보냈다. 지금까지 고객 40%가 해지에 응했다고 한다. 팻 핑거 위험엔 누구나 노출될 수 있다. 난감하지만 솔직한 설명과 사과가 후유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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