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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일본 눈치 봤나?…외교부, 강제동원 피해자 훈장 수여 '보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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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외교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의 국민훈장 수여에 '보류'의견을 냈다. 절차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외교부 설명이지만, 훈장 수여를 결정하는 주무부처가 아닌데도 이러한 의견을 제시한 것을 두고 일본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8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성명을 통해 "12월 9일 '세계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받기로 되어있던 '2022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이 돌연 보류됐다"며 "외교부가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하며 막아 나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역시 이날 규탄 성명서를 통해 "국가인권위원회가 '2022 대한민국 인권상'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할머니를 추천했지만, 행정안전부가 국무회의에 안건 상정을 하지 않아 최종 무산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심사를 거쳐 확정된 최종 추천 대상자가 국무회의 절차를 거치지 못해 수상이 무산된 경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상훈법 제7조에 따르면 서훈을 수여하는 데 있어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끔 되어 있다. 외교부는 그러한 과정에서 관계부처 간의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관련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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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이 8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진행된 정례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E-브리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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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지난주 중반 차관회의 직전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해당 사항을 전달받은 뒤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고 인지하고 관련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가 지적한 절차상 하자는 국무회의를 거치기 전에 사전에 차관회의에서 협의하는 것이 관행인데 이번에 인권위가 이 부분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정부부처 간 관행에 불과하며 실제 상훈법이나 관련 시행령 어디에도 법적으로 규정된 바는 없다. 임 대변인이 언급한 상훈법 7조에도 "서훈이 추천된 경우에는 서훈에 관한 의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여야 한다(제1항)"는 것과 "대통령은 제1항에 따른 서훈에 관한 의안에 대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서훈 대상자를 결정한다(제2항)"는 내용이 있을 뿐 차관회의 전 사전 협의에 대해서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에 외교부가 절차보다는 한일 관계를 고려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이날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과 다르다"며 "(양금덕 할머니에게)서훈을 수여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의견)을 제기한 것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 해명은 이 당국자 스스로가 한 발언을 통해 설득력을 잃었다. 외교부가 주무부처는 아니지만 서훈 수여 관련해 협의를 해야 할 부처라면 외교부 내에 어떤 실국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 당국자는 "많은 부서가 관련돼 있다. 아시아태평양국뿐만 아니라 국제기구국도 있고"라고 답했다.

아시아태평양국은 일본을 포함한 아태지역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외교부가 양금덕 할머니의 서훈 수여에 대해 수여의 적절성 여부가 아니고 절차상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이었다면, 이 문제를 검토하는 부서 중 하나로 아시아태평양국이 포함돼야 할 이유가 없다.

즉, 외교부는 절차상 문제만 제기했다고 밝혔으나 결국 일본과 관계에서 이 사안이 어떻게 비춰질지를 염두에 두고 보류 의견을 낸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서훈 수여와 관련해 어떤 내용의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고 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그 사안까지는 확인드리기 어렵다"면서 구체적인 답을 피했다. 또 사전협의 진행되면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이냐는 질문에도 "현 시점에서 언급드리기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양금덕 할머니 "사죄 한 마디 듣기가 이렇게 어렵네"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외교부의 절차상 하자 언급에 대해 "국무회의 최종 심의 과정에서 관련 부처 의견을 듣는 것은 통상적인 절차의 하나로, 결격사유가 있지 않는 한 이견 없이 통과되는 것이 관례"라며 "관련부처 의견 때문에 최종 수상자 선정이 무산된 경우가 과연 언제 있었는지 그 사례를 제시해 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실무 주관 국가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미 적격성 여부 등 대상자에 대해 면밀한 심사를 거쳐 최종 추천한 상태에서, 외교부는 어떤 결정적 이유가 있어 협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인지 당장 밝혀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만약 외교부가 적격성 여부 등 수상에 심대한 흠결이 있음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순전히 윤석열 정부 들어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대일 기조에 따른 정치적·외교적 고려 때문이라고 밖에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일본 비위 상하면,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인권상' 하나도 주지 못하나? 외교부가 앞장서서 추천해도 부족할 판에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30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오가고,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고군분투해 온 한 많은 일제 피해자에 대해 일본도 아닌 우리 정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철저하게 짓밟을 수 있나"라며 반발했다.

이어 "지난 9월 박진 장관을 만나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해온 양금덕 할머니의 바람이 일본에 거슬리기라도 했던 것인가. 이것이 저자세 외교, 굴욕외교가 아니면 무엇인가"라며 "윤석열 정부가 이 정도라면, 차라리 피해자에게 어서 죽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건 나라가 아니다. 국민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개탄한다"고 밝혔다.

수상 대상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수상 보류 소식에 "나이는 먹었어도 상 준다는 것이 좋았는데 뭐 때문에 안준다는 건지"라며 "사죄 한마디 듣기가 그렇게 어렵다. 기분이 좋았는데 좋다가 말아버렸다"라고 허탈함을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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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2022 대한민국 인권상' 보류 소식을 들은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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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일본과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실무자가 실제 소송에 참가한 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날 신임 아태국장은 임명 이후 처음으로 광주에 찾아가 피해자측과 면담을 가졌다. 이렇게 피해자측과 면담을 하면서도 뒤로는 피해자의 정부 훈장 수여를 막으려는 외교부의 행태를 보며, 피해자들이 정부를 신뢰하고 정부의 요구에 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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