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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팩트체크] 미국·영국선 주소지 없어도 사회보장급여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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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복지체계선 주소 없거나 거주지-등록주소 다르면 복지혜택 누리기 어려워

영·미선 지인·직업안내소 주소 등록해도 수당·복지혜택 받을 수 있어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서울 서대문구 모녀 사망 사건 등 생활고에 시달리던 취약계층이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지난주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복지제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복지제도가 환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한국 같은 경우 주소지를 기반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신청하게 돼 있어, 거주지와 등록 주소지가 다른 경우 거주지 주민센터를 찾아가도 등록된 주소지로 가라고 밀어내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 주소지가 없더라도 사회보장제도를 신청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취약계층이나 거주지가 일정치 않은 노숙인도 쉽게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법상 등록 주소지를 기초로 한 현행 복지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 등 해외에선 우리나라와 달리 거주지 주소를 등록하지 않고도 생활보조금 같은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연합뉴스

복지 사각지대 해소 요구 기자회견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29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민주노총 등 주최로 열린 '복지 사각지대 해소, 복지 예산 및 인력 확대 요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2022.8.29 hama@yna.co.kr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지원하기 위한 우리나라 '국민기초생활 보장법' 19조에는 생계, 주거, 의료 등 기초생활급여를 지급하는 보장기관은 수급자가 실제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자치단체로 돼 있다.

이 조항대로라면 생계급여 수급권자는 거주지에서 급여를 신청해 받을 수 있지만, 이때 거주지는 주민등록상 주소지와 일치해야 한다. 다만 제도상으론 실거주지와 등록된 주소지가 다르거나, 노숙인처럼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사람도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2022 국민기초생활보장 사업안내'를 보면 거주불명 등록이 됐거나 주소 확인이 불가능한 사람, 주민등록지와 실제 거주지가 다른 사람, 비닐하우스·쪽방 등에 거주하는 사람, 노숙인 등을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으로 분류해 별도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비닐하우스·판자촌·쪽방·여인숙·고시원·독서실, 목욕탕, PC방 등에 거주하는 사람은 해당 거주지에서, 노숙인은 노숙인자활시설에서 최소 1개월 이상 생활한 사실을 확인받아야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할 자격이 생긴다. 다만 주민등록이 된 사실이 확인돼야 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 사회복지전산번호를 부여해 관리한다.

그러나 주거가 일정치 않은 취약계층에게 등록된 주소지부터 요구하는 이 같은 복지제도 운영 방식이 현실에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복지 사각지대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주소지가 없거나 주소지를 밝히지 못하는 사람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보장 방안
[보건복지부 '2022 국민기초생활보장 사업안내' 발췌]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 가운데는 폭력적인 빚 독촉 등으로 인해 신분 노출을 꺼리거나 주소 등록을 기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 다세대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모녀와, 지난 8월 암·희귀병 투병과 생활고에도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실이 알려진 수원 세 모녀는 모두 이사를 한 뒤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노숙인들의 경우 의탁할 시설이나 거처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활시설이나 임시 주거지에서 1개월 이상 거주해야만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할 수 있게 한 현행 제도가, 지원 가능성을 낮추고 복지제도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한국도시연구소가 2020년 서울시 의뢰로 수행한 연구용역 결과인 '서울 재난 상황에서 노숙인 등 인권 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는 "현행 제도상 주소지가 없는 홈리스(노숙인)는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할 수 없고,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서도 임시주거비지원사업(신청)이나 노숙인시설에 먼저 입소해야 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소요 시간이 길어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 때 지급된 전 국민 대상 재난긴급생활비도 노숙인들은 주소지 문제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연합뉴스

미국 연방사회보장국, 사회보장급여 신청시 노숙인 권리 보장
[미국 연방사회보장국 홈페이지 캡처]



반면 영국과 미국에선 취약계층이 등록된 주소지 없이도 사회보장급여를 신청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영국은 2014년부터 기존의 복잡한 복지제도를 개선해 6개 복지수당과 다양한 공제제도를 하나로 합친 '통합수당'(유니버설 크레딧)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영국 정부 웹사이트(www.gov.uk)에 게시된 통합수당과 노숙인에 관한 안내문을 보면, 통합수당 신청자에게 일정한 주소가 없는 경우, 가족이나 지인 주소나 호스텔 주소, 직업안내소 주소를 임시주소로 쓸 수 있게 한 걸 알 수 있다. 안내문에는 이혼 뒤 딸과 함께 노숙자가 된 여성이 신분증명서 없이도 친구 집 주소를 임시주소로 해 통합수당 지원을 받은 사례와, 가족이나 친구 주소조차 사용할 수 없었던 18세 신청인에게 직업안내소 주소로 통합수당을 신청하도록 한 사례가 소개돼 있다.

미국에선 65세 이상이거나 장애를 가진 저소득층에게 일정액(2022년 기준 개인 841달러·부부 1천261달러)을 지원하는 생활보조금(SSI) 제도와 장애인들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사회보장장애보험(SSDI) 제도를 운영한다. 미국 연방사회보장국은 웹사이트(www.ssa.gov)에 이 두 제도에 따른 급여를 신청할 때 노숙인도 노숙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해 놨다.

별도 안내문을 보면 생활보조금을 받는 데 주소나 주거지는 필요 없고, 신청인에게 서류를 전달하기 위한 우편물 배달지를 보호기관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설명도 있다.

아일랜드는 2019년부터 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우체국인 '언 포스트'(An Post)에서 노숙인이나 임시숙소 거주자에게 개인 우편주소를 부여하고 우편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 사회복지 급여를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연합뉴스

영국 '통합수당'(유니버설 크레딧) 노숙인 신청시 주소 관련 안내
[영국 정부 웹사이트 캡처]



올리비에 드 슈터 유엔 극빈·인권 특별보고관은 2020년 보고서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빈곤층이 처한 다면적인 현실에 맞게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언급하면서 "노숙인이나 사회보호시설 거주자에게 주민등록과 주소를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해외 사례와 국내 복지제도 현실은 국내에서 현행 대책만으론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는 데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건강보험료나 공과금 연체 정보 등을 바탕으로 거주불명 상태의 취약계층을 더 철저히 찾겠다는 입장이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들 스스로 어려움 없이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게 제도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복지서비스를 거부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사는 거주지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까지 지원을 받게 하긴 쉽지 않다"며 "일부 지자체에서 이름, 생년월일, 시·군 정도의 주소만 확인한 뒤 지원하는 노숙인 귀향여비사업 같은 것이 있는데 긴급복지지원제도에 적용 가능한지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아일랜드 우체국, 노숙인에게 우편주소 서비스 제공
[아이리시타임스 보도 내용 캡처]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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