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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고현곤 칼럼] 대통령, 작은 싸움에서 벗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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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이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중단한 지 보름이 지났다. 논란이 있지만,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소모적 정쟁이 줄어든 건 분명하다. 중단 후 2주 동안 대통령 지지율이 33.4%에서 38.9%로 올라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도어스테핑은 국민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순기능보다 논란을 증폭시키는 역기능이 컸다. 대통령이 실언하고, 반대 진영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흠집을 내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방송사 패널과 유튜버들은 ‘아니면 말고’ 식의 분석을 늘어놓으며 대통령 발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걸 지켜보는 국민은 피곤했다.

대통령이 아침마다 오만 가지 질문을 받는 것부터 아슬아슬했다. 대변인이 해도 될 만한 문답까지 직접 해야 했다. 대통령이 수많은 현안을 모두 꿰뚫고 있을 수는 없다. “언론에 장관들만 보이고 대통령은 안 보인다는 얘기가 나와도 좋다”는 대통령 뜻과도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다. MBC와의 돌발 설전은 대통령 입장에선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언론은 유감을 표했다. ‘도어스테핑도 안 할 거면 용산으로 왜 옮겼느냐’고. 원론적으로는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어설픈 도어스테핑, 곁가지로 흐르는 도어스테핑이 국정 운영과 소통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다.



준비 안 된 어설픈 도어스테핑

중단 후 논쟁 줄고 지지율 올라

재개하면 소모적 정쟁 또 늘 것

노동·연금·교육 큰 싸움 집중하길

무엇보다 대통령실은 도어스테핑을 제대로 할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미국은 기자들이 백악관 탑승장에서 헬기를 타러 오는 대통령에게 짧은 질문을 한다. 대통령이 답변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선택이 대통령의 전략이다. 스치듯 지나가며 답하는 것 같지만, 대변인이나 각 부처와 정교하게 조율한 메시지를 내놓는다. 그 짧은 문답을 위해 참모들이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정부의 최종 입장이란 무거운 무게를 갖기 때문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도어스테핑을 하면 크고 작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자신도 도어스테핑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 검사 시절 법조 기자들을 허물없이 대하는 식으론 한계가 있다. 대통령의 표정, 제스처, 어법, 이 모든 게 국가의 메시지다. 그런 면에서 매끄럽지 않았다. 진솔하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선의로 받아들일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피터 드러커)

아쉬운 건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인사 실패 비판에 대해 “전 정권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손가락을 흔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검찰 중용에 대해 “과거엔 민변 출신으로 도배했다”고 응수했다. “선거 때도 지지율은 별로 유념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어서”…. 대통령의 언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직설적, 감정적이었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상황에 대해 참지 못하는 성격이 아닌가 싶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는 얘기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도어스테핑을 재개하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게다가 눈에 불을 켜고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내심 도어스테핑 중단이 아쉬울 것이다. 탁현민 문재인 정부 의전비서관은 도어스테핑 중단에 대해 “허무한 종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2019년 문 대통령 기자회견 당시 경기방송 기자의 돌발 질문을 갖다 붙였다. “청와대는 그것을 이유로 기자회견을 하지 말자거나 그 기자가 예의가 없으니 제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1년에 고작 두세 차례 기자들을 만났다. 불통 대통령이다. 그를 통 크게 소통한 대통령으로 묘사하는 것은 낯 뜨겁다.

그보다는 대통령의 언어를 쓰지 않다가 실패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미묘한 현안에 쉽게 흥분했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구사해 소모적인 논쟁거리를 만들고, 싸우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곤 언론 탓을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선 “대통령의 거칠고 역설적인 화법이 국가 운영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기자들의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형식, 격식, 언어 파괴를 통해 변화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민심 이반이었다.

윤 대통령은 작은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는 싸우면서 컸다. 법과 원칙을 앞세운다. 물러서지 않는다. 사과에도 익숙하지 않다. 이런 스타일이 조국·추미애와 싸울 때는 먹혔다. 대통령인 지금은 좀 다르다. 누구와 다투면 같은 급이 된다. MBC와 싸우는 순간 MBC의 맞상대가 된다. 자칫 작은 싸움에 힘을 빼다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민주노총 파업에서 드러났듯 굵직한 현안이 널려 있다. 국민은 노동·교육개혁을 누가 어디서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연금개혁은 개편안 마련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잡았다. 그때는 총선 정국이다. 정상적인 논의가 어렵다. 손에 잡히는 규제 개혁과 공공부문 개혁도 보이지 않는다. 저출산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자유’를 외쳤지만, 국민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건지 분명치 않다. 집권 7개월 지나도록 진짜 큰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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