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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명작…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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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유럽 미술유학 1호 배운성의 ‘가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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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5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배운성의 <가족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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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유럽 화단 한복판에서 조선 화가가 서양 화법으로 그려 전시했던 뛰어난 그림이 파리 구석에 남아 있던 겁니다. 그것도 한복 입은 우리네 가족의 집단 초상화가…. 저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1999년 10월 프랑스 파리 한 골동품상의 창고에서 당시 한국 유학생 전창곤씨는 기적적인 발견을 한다. 비교문화사 연구자료를 찾기 위해 현지 화랑가에 나온 역대 한국 미술가의 작품을 수소문하던 이 불문학도에게 1920년대 국내 최초로 유럽에 미술 유학을 갔던 월북 작가 배운성(1900~1978)의 실제 작품들이 40점 넘게 파리 골동품 가게에 보관된 사실이 포착됐다. 몇차례 흥정이 오간 뒤 그는 확인을 위해 파리 변두리의 창고를 방문했다. 거기서 작가의 자화상, 여러 소품과 함께 화포에 둘둘 말려 있는 유난히 큰 작품을 펴보았는데 놀랍게도 화폭에 한복을 입은 노란 저고리의 여인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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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유럽에서 그린 배운성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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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한국 근대미술사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공인되는 배운성의 대표작 <가족도>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해인 2000년까지 1년 동안 그는 자화상과 동서양 인물화, 전통 풍속과 풍경을 서양 화법으로 그린 그림 등 모두 48점을 입수해 귀국했다. 그 이듬해인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배운성을 알리는 공개전을 치렀다.

반향은 가히 뜨거웠다. 조선인 최초로 유럽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화단 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인 화가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해방 뒤 좌익 화단 활동과 한국전쟁 이후 월북으로 남한의 미술사에서 사라졌던 천재 화가는 단박에 재조명 0순위 작가로 주목받았다. 현재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으로 재직 중인 전창곤씨가 각별하게 신경을 쓰면서 발굴했던 <가족도>는 높은 완성도, 인물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 등이 어우러지면서 한국 근대 회화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떠올랐고,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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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의 가운데 아랫부분. 집에서 키우는 서양 개와 색동옷을 입은 채 주저앉은 아이의 이미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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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의 왼쪽 면. 한복을 차려입은 두 소년 소녀 옆으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드러낸 청년 화가 배운성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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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명작으로도 꼽힌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라크마 뮤지엄의 한국 근대미술 특별전 ‘사이의 공간’에 나와 미국 관객들을 맞고 있는 전시의 대표작이지만, 동기나 제작 과정에 관한 기록자료는 전혀 없다. 1930년대 초반 독일에서 고국의 가족 풍경을 떠올리며 그렸다고 추정할 뿐이다. 세로 140㎝, 가로 200㎝의 큰 화폭에 각기 다른 자세와 몸짓을 하며 정면을 주시하는 17명 대가족을 유화로 담은 <가족도>는 원래 1935년 독일 함부르크미술박물관 개인전에 출품한 뒤 파리 화실로 가져와 보관했던 작품으로 1940년 나치 독일군 침탈이 임박하자 파리를 급히 떠나면서 남겨놓고 갔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작품들 중 하나였다. 그림 속 가족은 그가 집사로 봉사했던 당대 갑부 백인기 일가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최근 미술사가인 김복기 경기대 교수 등이 배운성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묘사한 것이란 설을 제기하면서 논쟁이 일고 있다. 1930년대에 그린 작가의 어머니 초상화(현재 사진 도판만 전한다)와 소품 <작가의 가족>에 나오는 어머니상이 <가족도>에서 여아를 안은 채 화폭 중심을 차지한 어머니 격의 여성과 빼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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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한가운데 손녀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 할머니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갑부 백인기의 모친이라는 설과, 그린 화가 배운성의 모친이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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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배운성이 그린 작은 유화 소품인 <한국의 어린이>. 배운성의 어린 조카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1930~35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도> 하단 부분에 주저앉은 채 나오는 아이 도상을 좀더 정교하게 확대시켜 그린 느낌을 준다. 이런 맥락 때문에 <가족도>를 배운성이 가족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설의 유력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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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그림은 음울한 느낌이 감도는 20세기 초 조선 상류층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배경은 멀리 뒤편이 보이는 널찍한 한옥 대청. 그 안팎에 가장 큰 어른인 마나님과 아들 내외, 손자들과 일가친척 등 집안사람들이 한복 차림으로 모였다. <가족도>의 흥취는 각각 다른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자세가 빚어낸 오밀조밀한 구도를 뜯어보는 데서 시작되는데, 한참 봐도 지루하지 않다. 유화답지 않게 맑고 부드러운 전통 담채화 색조에 서양 원근법 구도의 배경이 어울리고, 인물 뒤편에 먼 풍경을 묘사한 서구 제단화 스타일이 전통 한옥을 배경으로 들어왔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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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오른쪽 면. 가장 크게 묘사된 여인은 화가 배운성이 유럽 유학 시절 수행했던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부인일 것이란 설도 나오지만 확실한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맨 오른쪽 노란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배운성의 동생 금자일 것이란 설이 대두되지만 역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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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은 갑부 백인기 집안의 서생으로, 주인 아들의 유학 수발을 위해 독일까지 갔다가, 베를린 국립예술학교에서 10여년간 수학했다. 해방 뒤 홍익대 미대 교수 등을 지냈으나 한국전쟁 때 월북해 평양미술대 교원으로 일했다. 북한에서는 판화 창작을 주로 했으나 1963년 숙청된 뒤 신의주에서 말년을 보냈다. 불안한 듯한 그림 속 식민지 근대의 초상들이 끝내 분단 그늘 속에 묻혀버렸던 작가의 비운과도 연결되어 작품의 속내는 더욱 깊어 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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