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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朝鮮칼럼 The Column] ‘무례한 언론’에 대처하는 권력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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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부터 가족 사생활까지 언론에

70년 내내 시달린 엘리자베스 여왕

조롱 퍼부은 언론인 만나 귀 기울여

언론은 태생적으로 권력과 갈등

호통치고 응징하려다 몰락한 文정부

삼류 언론에도 아량 필요한 이유

조선일보

윤석열 대통령이 11월 18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취재진과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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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 ‘저널리즘토크쇼 J’라는 프로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부터 3년간 방송된 이 프로는 ‘미디어 비평’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정권을 비판하는 보수 언론만 때리고 조롱하는 정치 쇼였다.

실제로 문 정부의 정치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대언론 방어전에 나섰다. 조국 사태 때는 조국 장관의 검찰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검찰과 언론이 합심해 논란을 주도한다고 비판했다.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사퇴했을 땐 위선일 뿐 불법은 아닌데 언론이 그를 진보 꼰대로 낙인찍어 2030세대가 586정치인들에게 분노하도록 선동한다고 꾸짖었다. ‘뉴스공장’ 진행자 김어준에 대해서는 기성 언론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언론인으로,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저널리즘 양식을 만들어냈다고 상찬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에서는 그 편향이 절정에 이른다. 언론이 ‘총살’ ‘불태워’란 표현을 써서 유족에게 상처를 입혔고, 무분별한 의혹 제기로 군사 첩보가 새어나갔으며, 김정은이 자발적으로 사과까지 했는데 이를 평가절하한다고 지적했다. 이 프로는 JTBC가 주최하는 2019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작품상을 수상했다.

‘저널리즘토크쇼 J’뿐만이 아니다. 당시 TBS를 포함한 지상파 라디오와 TV 시사 프로들은 문 정부의 대변자나 다름없었다. 여권의 강성 정치인들을 앞세워 최저임금제부터 탈원전 정책까지 논쟁이 첨예한 사안들에 대해 여론 몰이를 주도했고, 이를 비판하는 언론들은 모두 적폐로 몰아갔다.

이를 5년간 지켜본 윤석열 대통령으로서는 현재 자신을 둘러싼 미디어 환경이 몹시 섭섭할 것이다. 문 정부 때처럼 공영방송들이 의기투합해 정부 정책을 밀어주는 것도 아니고, 좌파 언론들이 촛불 권력을 맹목적으로 옹호했듯 보수 언론들이 앞장서 윤 대통령과 정부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즉위 70년 동안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언론에 보여준 처세와 지혜가 놀랍다. 군주제 존립 기반이 나날이 위태로운 가운데 영(英)연방 국가들에 대한 리더십, 외교 능력, 총리들과의 관계는 물론 남편, 동생, 아들, 며느리의 사생활까지 하나하나 표적이 되어 공격받는 일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모욕적인 공격 중 하나는 즉위 6년, 그녀가 서른두 살 때 일어났다. 재규어 자동차 공장에서 여왕이 한 연설에 대해 어느 이름 없는 군소 매체가 독설과 조롱을 퍼부은 것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숨 넘어갈 듯 들리는 여왕의 연설은 그 내용이 청중에게 무심하고 타성에 젖어 있다… 여왕은 원고 없이는 단 몇 문장도 잇지 못하는 듯하다… 시종들은 모래 속에 고개를 묻은 타조들처럼 궁이 바깥 세계와 함께 진화하는 걸 막고 있다… 군주제는 번영은커녕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여론이 술렁이자 왕실 참모들은 힘없는 매체이니 무시하고 취재 배제를 통해 응징하자고 조언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문제의 편집인 올트링엄 경을 만나 그의 신랄한 비판을 직접 듣는다. 왕실 문턱부터 낮추라는 제안에 성탄절 연설을 TV로 중계하고, 노동자 등 평범한 서민들을 궁으로 초대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시작한다. 왕실은 훗날 올트링엄 경이 20세기 군주제에 크게 기여했다고 감사해했고, 엘리자베스 2세는 겸손과 포용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국가원수로 역사에 기록된다.

권력 감시가 본분인 언론은 태생적으로 권력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동맹 국가에 자신이 욕설을 날렸다고 우기는 공영방송과, 날조 수준의 악의적 보도를 일삼는 인터넷 매체의 행태에 화가 날 것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직접 “국익” “배제” “고통”이란 단어로 응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옹졸하다’는 역공에, 삼류 언론을 ‘민주 투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분노하고 호통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다 몰락한 권력이 문재인 정부였다. 충성 경쟁을 하던 지상파 방송들도 함께 추락했다. 공정성 논란과 신뢰도 하락으로 뉴스 시청률은 반 토막이 났고, 광고 매출·영업이익도 급락해 ‘생존 위기’ 우려까지 나왔다. 국민과 시장은 이토록 무섭고 냉정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러했듯, 언론엔 통 큰 처세가 답이다. 이재명 대표는 2018년 경기지사에 당선되던 날 “(언론의 질문이) 무례하다”고 화를 내며 인터뷰를 중단했지만, 권력에 무례해도 되는 게 언론이다. 왕관의 무게, 민주주의의 무게를 견뎌내는 건 그래서 어렵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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