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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정부는 “단순 의견 조회” 깎아내리지만…ILO 협약 위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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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 ‘개입’ 결정 의미

한겨레

화물연대 파업이 11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온이 뚝 떨어진 4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의왕컨테이너 제2기지 주차장에 설치된 농성 텐트에서 파업 노동자가 이불을 가지고 텐트로 가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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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에 국제노동기구(ILO)가 기본협약 위반을 우려하며 ‘개입’에 나섰다. 국제노동기준 위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추가 업무개시명령 발동 준비에 들어갔다.

4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국제노동기구는 지난 2일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 “민주노총이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 즉시(immediately) 정부 당국에 개입(intervene)했다”며 “관련 협약에 나오는 결사의 자유 기준과 감시감독기구 입장을 (한국 정부에) 상기시켰다”고 밝혔다. 지난달 28일 민주노총과 공공운수노조가 업무개시명령과 대체수송인력 투입이 국제노동기구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87호)과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제29호)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개입을 요청한 지 4일 만이다.

정부는 국제노동기구가 보낸 서한을 ‘외교 문서’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국제노동기구가 민주노총에 보낸 서한에서 “관련 협약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감독기구 입장을 상기(recall)시켰다”고 밝힌 점으로 보아, 산하 감독기구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화물 노동자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취지로 한 과거 권고가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또 “총파업이 국민 생명, 건강, 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경우 이외 업무복귀 요구는 결사의 자유 원칙에 반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고용노동부는 “(화물연대 파업이) 국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국민 생명·건강·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불가피하게 업무개시명령을 한 것이라는 점을 국제노동기구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개입에 대해 “관례적으로 이뤄진 단순 의견조회 요청”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개입은 국제노동기구 공식 감독 절차는 아니다. 통상 회원국 노동조합 등이 국제노동기준 위반 사항에 대해 국제노동기구 산하 감독기구 ‘결사의 자유 위원회’ 등에 진정(제소)하면, 감독기구가 해당 정부에 정보를 요청하고 조사를 진행해 문제 해결에 필요한 권고 사항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국제노동기구는 사안이 심각하고 긴급한 경우, 사무총장 직권으로 협약 내용과 해당 정부에 대한 기존 권고 등을 바탕으로 정보 및 의견 제출을 요청하는 ‘개입’을 한다. 문제가 제기된 정부에 의견을 달라는 방식으로 협약 위반 우려를 표명하는 셈이다. 국제운수노련의 루완 수바싱게 법률국장은 <한겨레>에 “개입 절차는 과거 결사의 자유 위원회 결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공식 절차가 아니라도 (해당 정부에 대한) 외교적 조처”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국제노동기구 개입은 지난해 정부가 결사의 자유 협약(제87·98호), 강제노동 협약(제29호)을 비준해 올해 4월 발효된 뒤 이뤄졌다는 점에서 과거 개입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노동기구는 박근혜 정부 시절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인정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법외노조 통보,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설립신고 반려처분 등에 개입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정부도 개입에 대해 “(노조가 한) 문제 제기를 해당 정부에 전달하고 의견을 구하는 ‘의견조회’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노동기구 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고 있으며, 국내법과 충돌할 경우 ‘신법 우선 원칙’과 ‘특별법 우선 원칙’에 따라 협약이 우선한다”고 설명했다. 협약을 비준한 회원국은 최소 3년마다 국내법이 협약 내용에 부합하는지 보고서를 제출할 의무도 있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국제노동기구 개입은 한국 정부의 국제노동기준 위반에 대한 ‘우려 표명’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비준 이후 결사의 자유 원칙 준수 의무 무게감이 달라졌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화물연대 파업 관련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정유·철강 등 추가 피해가 우려되는 업종은 즉시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화물연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경제 전체를 지금 볼모로 잡고 있다. 이는 법치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며 “정부는 조직적으로 불법과 폭력을 행사하는 세력과는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법과 원칙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고 강조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회의 뒤 브리핑에서 국제노동기구 서한에 대해 “사무총장 명의로 서한이 온 것은 맞다”면서도 “이는 단순한 의견조회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부 대응은 국제사회로부터 ‘노동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애림 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국제노동기구가 요청 4일 만에 신속하게 개입한 것은, 화물연대와 관련해 여러 차례 강력한 (개선) 권고를 한국 정부에 했기 때문”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인권 후진국’으로 평가될 수 있는데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는 국제노동기구 개입과 별개로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 제소할 방침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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