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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리스마스에는 ‘명동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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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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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코로나 팬데믹으로 3년간 길을 잃은 주연 배우를 기다리며 쓸쓸히 달빛만이 비추던 텅 빈 무대, 명동 거리에 크리스마스 불빛과 함께 다시 낭만이 찾아왔다. 어렸을 적부터 이상하게 명동에만 가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낭만이 뭔지도 모를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80년대 연말 엄마 손을 잡고 간 명동,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엄마한테 받은 백 원짜리 동전을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는 나를 보며 찡긋 웃어주던 구세군 아저씨의 따뜻한 미소와 종소리는 지금도 내 가슴에 울려 퍼진다.

초중고 동창이었던 크라잉넛 친구들과 중학생 때는 방학이 되면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명동의 햄버거집에 가서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수다를 떨다 왔다. 케첩맛이 다른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것도 없는 감자튀김인데, 명동에서 먹고 오면 왠지 문화생활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는 쌈짓돈을 모아 친구들과 쇼핑을 했고, 중국 대사관 앞에서 수입 악보를 사오곤 했다.

수능이 끝난 후 친구들과 주유소, 전단지 돌리기, 포스터 붙이기 외에 크리스마스에 명동에서 유동 인구를 조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에 7, 8시간 한자리에 서서 찰칵찰칵 소리 나는 계수기로 오가는 사람 수를 세는 일이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한 자리에 서 있느라 너무 추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명동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니 한편으론 행복했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눈싸움을 하며 명동 거리를 가로질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추억이 있다. 여자친구도 없고, 명품을 걸치지도, 맛난 것을 먹지도 않았지만, 분명 우리는 즐거웠다.

그 시절 명동에는 노점상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와 노란 전구들, 그리고 화려한 네온사인과 레코드 가게에서 흥겹게 흘러나오던 캐럴들, 더욱 이국적 정취를 풍기게 했던 고딕양식의 성스러운 명동 성당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명동에서의 추억들을 춤추게 한다.

그런데 왜 낭만 1번가가 신촌도 아니고 신사동도 아니고 명동일까? 얼마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 <명동백작>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1939년 명동에서는 청마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미당 서정주 시인의 그리운 서신이 왕래하고, 노란 스웨터의 멋쟁이 김수영 시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해방 직전 명동의 플라워 다방, 서양풍 콜롬방 빵집, 음악다방 돌체와 에덴에서 문인, 음악가, 화가들이 두루 모여 음악을 들으며 예술에 대해 토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 폐허에 꽃이 피듯 명동에는 다시 낭만이 피어났다.

고등학생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작가 전혜린도 명동의 음악다방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박인환 시인은 ‘술병에서 꽃이 쏟아지고 별이 흘러나오는 환상이 생길 때까지’ 마음 내키는 대로 마셨다고 한다. 명동은 6, 70년대에도 문화의 중심지였다. 히식스 등으로 대표되는 70년대 그룹사운드의 메카 ‘오비스캐빈’이 있었고,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김민기 등이 활동한 포크의 성지 ‘쎄시봉’도 있었다. 많은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그 시절 명동에 모여들었다.

크라잉넛은 1995년 홍대 지하에 있는 라이브 클럽 ‘드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6년에 처음으로 지상에서 한 공연이 명동과 홍대앞 ‘스트리트 펑크쇼’였다. 우리가 인디밴드로서 처음 시작한 홍대와 어릴 적 추억이 서린 명동에서 한 첫 야외 공연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옛 낭만 가객 선배님들 앞에서는 감히 낭만의 ‘낭'자도 입에 담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아주 살짝은 낭만의 계보를 잇는다고 우겨본다.

명동에는 왠지 돈키호테 같은 낭만과 저항의 정서가 서려 있고, 가슴 저려오는 애틋한 추억이 있다. 암울했던 시기, 명동에 모인 예술가들은 문학과 음악, 그리고 그림으로 삶을 위로했다. 이런 낭만이야말로 치열한 삶의 갈망이지 않나 싶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명동은 하나씩 품고 산다. 동방싸롱에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그때처럼 지금 홍대에 사랑방처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제비다방이 내 마음속 명동이다. 자신만의 추억과 시와 낭만이 있다면 그곳은 명동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추억을 담아 만든 곡이 ‘명동콜링'이다. 누구에게나 영화처럼 아련하고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크라잉넛의 ‘명동콜링’ 가사를 남겨본다. ‘크리스마스 저녁 명동 거리 수많은 연인들 누굴 약 올리나.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생각해 보면 영화 같았지. 관객도 없고 극장도 없는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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