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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어둠 속에서 진실을 읽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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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올빼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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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빼미>의 줄거리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21세기 가장 사랑받는 장르 중 하나는 사극이다. <명량>(2014)이나 <남한산성>(2017) 같은 전통사극도 여전히 대중적이지만 <광해>(2012)나 <관상>(2013) 같은 퓨전사극이야말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이야기다. 퓨전사극은 민족의 과거를 극화했다는 역사성과 동시대의 시대정신에 조응하는 적극적인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는 당대성의 노골적인 공존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퓨전사극은 역사를 둘러싼 해석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기도 하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퓨전사극을 본다는 건 아주 정치적인 유희를 즐긴다는 의미다.

리버럴의 세계관 보여줬던 사극

지난 20년간 펼쳐진 해석 전쟁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건 이른바 ‘리버럴’의 세계관이었다. 2000년의 첫 10년 동안은 꽤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던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퓨전사극은 대체로 민주당계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49%-51%에 해당하는 관객들에게 어필했다. 이런 경향은 <광해>에서 큰 성공을 보았고 <창궐>(2018)에까지 이어졌다. 이 계열의 영화들 옆에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적극적인 참조를 바탕으로 하는 <변호인>(2013), <택시운전사>(2017), 그리고 <1987>(2017)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이 시기 퓨전사극을 지배하는 건 선군에 대한 선망이다. 세종이나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2000년대 후반 이후의 드라마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역시 믿고 기댈 수 있는 리더를 상상하고 재현하고자 했다. <광해>와 <창궐>은 특히 그 형상을 민주당계 정치인으로부터 찾았는데, 광해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광대이자 서민의 왕이었던 하선(이병헌)은 “조강지처를 버리란 말이요?”처럼 노무현이 생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대사로 읊었고, ‘야귀’(夜鬼)가 창궐한 세상에서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 자괴감이 든다”던 타락한 왕 이조(김의성)가 자멸한 후 왕위에 오른 이청(현빈)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왕(대통령)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횃불(촛불)을 든 백성들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왕좌에 오른다. 이 작품들에서 적폐는 계몽 군주와 적대하는 ‘고인물’, 즉 귀족들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그사이에 조국 사태 이후 본격화된 리버럴에 대한 불신이 결국 정권교체로 이어지면서 ‘용산 시대’가 열렸고, 오랜만에 또 한편의 퓨전사극이 개봉됐다. 퓨전사극의 정치적 무의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안태진 감독의 <올빼미>는 <인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소현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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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3년. 타고난 시각장애 때문에 예민하게 발달된 청각과 수련을 통해 갈고닦은 침술로 뛰어난 의술을 행하는 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경수가 조금씩 궁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갈 무렵,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다. 최대감(조성하)을 필두로 하는 친청(親淸) 세력들은 그를 이용해 친명(親明)을 고집하는 인조(유해진)를 견제하고자 하고, 인조는 친청 세력의 구심이 되어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소현세자가 영 편하지 않다.

알 수 없는 긴장이 궁을 휘감아가던 어느 날, 밝은 곳에서는 볼 수 없으나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 경수가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궁궐 안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던 경수가 범인으로 몰리게 되고, 누명을 벗기 위해 경수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세상에 알려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하는가? 세자빈에게? 왕에게? 아니면 최대감에게?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가면서 2020년대 버전의 정치적 상상력을 펼쳐낸다.

<올빼미>는 주맹증에 기대어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만들어냈다. 주맹증은 어두운 곳에서보다 밝은 곳에서 시력이 떨어지는 증상이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음모가 경수에게만은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경수의 주맹증은 진실이 가려진 시대에 누가 그 진실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드러나는 진실이란 자신의 불안을 위로하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독살하는 미친 아버지의 존재다. 여기에서 2010년대까지 한국 퓨전사극을 사로잡고 있었던 선군에 대한 판타지는 무참히 깨진다. 구안와사로 일그러진 인조의 얼굴은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지키는 리더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리 하나 보전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기성세대의 치졸하고 비루한 얼굴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왕과 대적하는 귀족이라고 해서 신뢰할 수 있는 ‘시대의 어른들’도 아니다. 청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 최대감과 그의 파벌은 야비하고, 권력만 차지할 수 있다면 무능한 왕과 어떤 거래라도 한다.

미치광이 아버지의 등장

이런 ‘어른들의 전쟁’에서 무참히 희생당하는 것은 자애로운 아들 소현세자와 그를 닮아 여리고 선한 어린 원손(세자의 아들)이다. 과거의 남성 서사는 아들이 살부(殺父)를 감행하여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아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자리잡은 시대와 함께 기꺼이 아들을 죽여버리는 미치광이 아버지의 형상이 등장한 셈이다.

2017년 문재인을 뽑았던 아들들은 2022년에 이르러 아버지의 배신을 질책하며 ‘석열이 형’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그리고 ‘석열이 형’은 누구보다도 아들들에게 관심이 없는 ‘성마른 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들들의 장르이기도 했던 퓨전사극은 이제 아들의 세대교체와 함께 믿을 것이라곤 자신의 능력밖에 없는 ‘맹인의 서사’를 산출했다.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이런 상상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건 무엇보다 리버럴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뼈아프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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