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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여성에서 남성이 된 신경생물학자···학계에서 마주친 변화[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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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안에 오랫동안 반응하지 않던 언론사

남성 이름으로 냈더니 즉각 답신했다

현실에 미치는 편향의 영향을 수학적으로 증명

‘행동 설계’로 장벽 넘자고 주장한다

경향신문

신경생물학자 벤 바레스는 트랜스남성이다. 그는 성확정 이후 학계에서 더 진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학계의 성차별의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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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의 종말

제시카 노델 지음·김병화 옮김|웅진지식하우스|500쪽|2만2800원

스탠퍼드대학교에 재직했던 신경생물학자 벤 바레스(1954~2017)는 43년 동안 바버라란 이름으로 살았다. 암 치료 때문에 한쪽 유방을 제거해야 했을 때, 그는 의사에게 다른 한쪽 유방도 제거해줄 것을 부탁했다. 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나 여자아이로 키워졌지만 한 번도 여자라는 성별을 편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양쪽 유방 절제술을 받고 나서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호르몬 치료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과학공동체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바버라에서 벤이 되고 나서, 그는 큰 변화를 마주했지만 우려와는 달랐다. 학계는 그를 이전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인정했다. 그가 트랜스젠더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더 유심히 들었다. 회의에서 백인 중년 남성인 벤의 말에 끼어드는 사람이 사라졌다. 벤은 성확정을 하고 나서야 그가 이전에 받고 있던 성차별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학술적 직업에 진출하는 비율이 부족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육아도, 가족에 대한 책임 때문도 아닙니다. (벤이 된 후에) 나는 백만 번도 더 생각했습니다. 더 진지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모든 트랜스젠더가 벤처럼 긍정적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백인 트랜스 남성(FTM)이었다. 트랜스 여성(MTF)은 바레스가 겪은 일의 반대의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흑인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 된 후 인종차별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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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의 종말>의 저자 제시카 노델은 학부생 시절 언론사에 많은 기획기사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J.D. 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제안서를 보내자 몇 시간만에 수락되는 경험을 하고 편향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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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제시카 노델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노델은 하버드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학부생 시절 언론 진출을 위해 기획안을 보냈지만 무반응에 낙담한 그는 실험 삼아 J D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내용을 보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기삿거리가 채택됐다는 답신이 도착했다. “제시카라는 사람은 똑같은 기삿거리를 전달하려고 몇 달 동안 애썼는데, J D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성공했다.”

노델은 이를 계기로 편향에 대한 글을 쓰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편향적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살핀 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을 찾아 해법을 모색한다. 편향이 어떻게 형성되고 우리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과학적으로 논증하면서도 편향을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적극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노델은 ‘편향의 종말’을 위해선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다며 이미 현실에 있는 대안적 현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노델이 주목하는 것은 명시적이고 노골적이진 않지만 의식 깊숙한 곳에서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암묵적 편향(bias)이다. 미국이 법적으로 인종차별을 철폐했지만,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이 심각한 이유, 기업에서 성차별적 규정이나 지시 없이도 여성에 대한 저평가와 승진 누락이 이뤄지는 이유가 바로 편향 때문이다. 편향은 성별·인종·민족·종교 등에 광범위하게 형성돼 우리의 머릿속에서, 조직과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편향의 표현과 해악의 범위는 취업 기회 박탈에서 치명적 신체적 위해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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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23일(현지시간)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의 1주기를 맞아 시민들이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추모행진을 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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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목을 짓눌려 질식사했다. 이 사건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플로이드의 사례에서 보듯, 백인 경찰들은 비무장한 흑인 남성일지라도 위협적으로 느껴 과잉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2016년 백인 경찰 야네즈가 가족과 함께 장을 봐오던 고등학교 영양감독관 카스틸을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을 파고든다. 야네즈는 “겁이 났고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졌다”고 답했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그를 지배한 것은 ‘인종주의적 공포’였다. 1000건에 가까운 경찰의 치명적 총격 사건을 분석한 결과 흑인 희생자는 총격 당시 비무장인 비율이 백인에 비해 2배 이상이었다. 백인 미국인들은 위협당하는 기분이 들 때 흑인들의 피부를 더 검게 느꼈다. 편향은 사람의 목숨을 뺏는다.

저자는 편향의 이유를 과학적 연구를 검토하며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인간의 뇌는 실시간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범주화, 본질화, 고정관념 형성의 3단계를 거친다. 실험 결과 유치원 아이들을 파란 옷과 노란 옷을 입은 그룹으로 나누고(범주화), 그 차이를 강조했을 때 자신의 그룹의 특성을 만들고 편애했다. 여자와 남자로 나눴을 때엔 성별 간 갈등이 너무 심해져 실험이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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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화를 통해 차이를 강조하면 서로를 구분하며 갈등이 심해지는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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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은 인간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인간의 두뇌는 불확실한 결과를 정확히 예견했을 때 쾌감을 느끼고, 예상이 빗나갔을 때 짜증과 위협을 느낀다. 백인 대학생들이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소개한 라틴계 학생들과 교류했을 때, 비호감뿐 아니라 혈관이 수축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생리적 위협 반응을 느꼈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라틴계 학생들은 가난할 것이란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빗나갔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중독’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편향사고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여성에게 존재하는 승진의 유리천장,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 등은 일자리와 성과뿐 아니라 건강과 안전, 교육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이를 실험하기 위해 버펄로 대학교 컴퓨터과학과 교수 케니 조지프와 함께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상의 회사 놈코프를 설립하고 직장 내에서 작동하는 여성에 대한 능력평가 절하, 실수 처벌 강도, 공적 박탈, 성격 불이익 등의 젠더편향을 3% 적용한다. 승진 주기가 20번 거치는 동안 남성이 최상층의 82%를 차지했다. ‘작은 수학적 차이’가 수많은 상호작용을 거치며 누적된 결과 최상층부에서 여성들이 사라졌다.

편향은 여성들이 일을 그만두도록 유도한다. 미국 유색인 여성 변호사 86%는 8년 이내 대형 로펌을 떠났다. 차별 때문에 승진에 누락되며 정신적·감정적 에너지를 쓰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에 계속 의문을 품게 해 ‘내적 가스라이팅’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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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2022년 3월 7일 발표한 29개국 유리천장지수. 한국이 꼴찌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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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편향적 행동이 습관과 같다고 말한다. 습관을 고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편향을 고치기 위한 ‘설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료 분야에서 성차별·인종차별은 심각하다. 저자의 흑인 여성 친구 크리스는 지속적 복통을 호소했지만 의사들은 소화불량이나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제대로 된 검사를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찾은 병원에서 그는 대장 내시경을 받고 거대한 종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병명을 알고 나서 친구는 안도했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5년 뒤 크리스는 숨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의료진의 적절한 처치를 더 적게 받고, 진통제를 더 적게 받는다. 심근경색을 겪은 여성의 치료가 위험할 정도로 지연된다. 유명한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는 출산 때 혈전증 병력을 말하며 증상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중에야 조치를 받았다. 흑인 여성이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할 확률은 백인 여성의 3~4배에 이른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병원은 의료적 차별을 없애기 위한 ‘행동 설계’를 했다. 혈전은 혈액 세포가 뭉친 덩어리로, 폐로 가는 혈류를 막을 수 있어 치명적이다. 한 해 10만명이 혈전증으로 사망한다. 올바른 응고 예방 대책을 세우면 막을 수 있지만, 전국 병원에서 환자들이 적절한 예방 대책을 처방받은 경우는 40%에 불과했다.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입원 환자 가운데 남성은 31%가 치료를 받지 못했고, 여성은 45%로 그 비율이 더 높았다. 외상외과 전문의 엘리엇 하트는 입원 환자들의 혈전증을 예방하기 위해 진료 과정에서 ‘점검 목록’을 도입한 결과 제때 적절한 혈전용해제를 처방받은 환자의 비율이 늘어났다. 젠더 격차 또한 사라졌다.

무고한 카스틸을 총으로 쏜 야네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야네즈는 위협을 느끼며 총을 쏘았다. “마음, 몸, 역사, 기관, 모두가 한데 합쳐져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상상의 위협이었지만 공포는 실제였다.” 문제는 경찰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대도시 경찰서에 관한 한 연구는 경찰관 4분의 1 이상이 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자살 충동 등을 숨기고 있다고 밝혔다. 2019년 미국에서는 순직자보다 자살한 경찰관의 수가 더 많았다.

저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관들을 상대로 ‘마음 챙김 훈련’을 실시한 오리건주 벤드시로 향한다. 연구 결과 마음 챙김이 고정관념 같은 정신적 습관의 ‘탈자동화’를 도와줘 마음 챙김 명상에 참여한 사람은 인종과 연령에 대해 암묵적 편향을 덜 보여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들을 대상으로 마음 챙김 훈련을 한 이후, 벤드시 경찰의 무력 사용은 40% 줄어들었다.

70명의 교수 가운데 여성이 단 한 명뿐이던 MIT의 기계공학부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MIT 여성 교수들은 더 적은 봉급과 더 적은 협업 기회를 받았고, 실험실 공간도 더 좁았다. MIT 기계공학부는 적극적 차별 개선 조치에 들어간다.

여성 지원자를 공격적으로 찾아나서 주변의 추천을 받고 과거 지원서를 뒤져 우수한 여성 교수 6명을 채용했다. 그중 4명이 종신 재직권을 얻었는데, MIT 일반적 종신 교수 비율 47%를 훨씬 웃도는 66%의 비율이었다. 여성 교수진이 늘면서 기계공학부를 전공하는 여성 학부생 또한 꾸준히 늘어나 절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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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언어 속 성차별 찾아보기’ 수업을 하고 있다. 아웃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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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성중립 유치원이 가져온 성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앞선 연구결과에서 아이들을 여성·남성으로 범주화하자 차이가 부각되고 갈등이 심해졌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성중립 유치원은 어느 것에도 ‘딱지’를 붙이지 않으려는 시도다. 저자는 이곳에서 젠더 평등성뿐 아니라 아이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편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편향의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다. 암울한 현실 진단에서 출발한 책은 암묵적 편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변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의식 깊이 뿌리박힌 편향을 없애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장기 프로젝트다. 개별 사례의 성과가 모든 편향을 없애는 데 적용되기도 힘들다. 편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변화의 첫걸음이 시작된다. 이 책은 계속해서 그 걸음을 이어가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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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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