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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제국대학 첫 여성 유학생 신의경의 대담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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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7년 센다이 도호쿠대 법문학부 입학...이화여전 교수, 광복후 첫 여성 의원

조선일보

조선인 여성 최초로 일 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의경. 도호쿠대 재학중인 1929년 입학동기인 박동길과 약혼 기념으로 촬영했다. /신의경 가족 제공


상급학교(대학) 진학은 한 세기 전에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월간지 ‘동광’이 ‘학교선택체험담’(1931년 2월호)을 주제로 각계 인사 20명에게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 ‘선택에 대한 만족 또는 후회 여부와 이유’를 설문조사를 했다. 시인 주요한이 1926년 5월 창간한 ‘동광’은 흥사단 계열 단체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띤 시사잡지다. 유길준 둘째 아들인 유억겸 연희전문교수, 양주동 평양 숭실전문교수, 이극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 등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설문에 응했다.

◇여성도 고등교육 받아야

서른셋 신의경은 동경여자의전을 나온 의사 이덕요와 함께 여성으로는 단둘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신의경은 조선 최초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여자 유학생이자 광복 후 첫 여성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낸 선구자였다. 1927년 센다이의 도호쿠(東北)제대에 들어가 서양사를 공부한 그는 1930년 졸업과 함께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했다.

도호쿠대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누구보다도 더욱 참상에서 살아나가는 조선 여성은 그 자체의 장래를 위하야 배우지 아니하면 안될 이 현상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근본인 가정을 맡을 여성으로서는 될 수있는 대로 보다 높은 교육이 필요하외다.’ ‘나는 여성의 고등교육을 어디까지 필요로 하는 동기에서 센다이로 갔습니다.’

신의경은 ‘여성에게도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일본의 교육은 ‘어떻게 살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까운 교육이요, 서양의 교육은 ‘어떻게 하면 잘 살까’의 문제를 해결케하는 교육인 듯 합니다…나로서는 급선무로 어떻게 살까의 문제를 선결문제로 보는데서 센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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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도호쿠대 조선인 유학생들이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 세번째가 신의경, 네번째가 박동길이다. /신의경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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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경은 1927년 3월 도호쿠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해 서양사를 공부했다. 신입생 350명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사진은 1913년 촬영한 도호쿠대학 교문./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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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의 벽’깬 도호쿠대

도호쿠대는 도쿄대, 교토대에 이어 1907년 일본에서 세 번째로 개교한 제국대학이다. 1945년까지 여학생을 받지않은 도쿄대·교토대와 달리 설립 초창기인 1913년 여학생 3명을 받아들여 금녀(禁女)의 문을 깼다. 신의경이 도호쿠대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학교 내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927년 3월20일 경부선 열차에 오른 그는 시모노세키를 거쳐 센다이에 도착했다. 2박3일 걸렸다. 23일은 전공과목, 24일은 영어와 구두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그가 입학하던 해, 신입생 350명 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유학생은 그를 포함, 8명이었다.

신의경은 집안에서 유학비를 대주는 ‘금수저’출신이 아니었다. 부모 모두 일찌감치 작고했고, 유학을 떠난 1927년이면 세는 나이로 서른 살이었다. 선교사 도움으로 근근이 학비를 낼 뿐,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다.

‘학비는 꼭 오늘 와야만 할 터인데 오지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다 못해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다.’ ‘오늘 마루젠(丸善)으로 책을 찾으러 갈 날인데 돈이 20전뿐이다. 10전이 부족하다.’

돈 걱정으로 가득한 그 시절 메모다. 그는 ‘미국의 종교개혁’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1930년 3월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졸업은 신문에 날 만큼 세인의 관심을 끄는 뉴스였다.

‘시내 관수동에 거주하는 신의경 양은 금춘에 동북제대 법문학부 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야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는데 조선 최초의 여(女)문학사로서 서양역사를 전공하였으며 그의 모교인 이화여전의 교편을 잡으리라더라’(‘조선 최초의 女문학사’, 조선일보 1930년3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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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첫 제국대학 유학생 신의경은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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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 공판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9년 12월18일자 기자. 신의경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결기간까지 포함, 2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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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커플로 만난 박동길

‘아, 이곳이 어찌 이리 적적한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일테지만 내게는 아무 인적이 없는 광야이다.’ 신의경은 유학 초기 고독으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달콤한 로맨스가 기다렸다. 입학 이듬해인 1928년 12월 유학생 망년회에서 입학 동기 박동길을 만난 것이다. 한살 위인 박동길은 스무살 때인 1917년 오사카 동양방적회사에서 일당 30전을 받는 견습공으로 출발, 오사카 고등공업학교를 거쳐 오사카 광영제약회사 기사로 일하다 서른 살에 도호쿠대에 진학한 만학도였다.

서른 넘어 만난 두 사람은 졸업 후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연인 사이가 됐다. 둘은 귀국 후인 1931년 6월 연지동 하마련 선교사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서른 넷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수와 서른 셋 이화여전 교수의 결혼은 당시로선 이례적인 만혼(晩婚) 엘리트 지식인의 결합이었다.

◇개신교 집안, 독립운동으로 옥고

신의경(1898~1988)은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신여성이었다. 어머니 신마리아는 정동여학교 교감, 연동교회 초대 여전도회장을 지냈고, 큰 이모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 작은 이모는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인 김배세였다. 신의경은 1918년 어머니가 교사로 있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면서 모교 교사로 남았다.

20대의 신의경은 열혈 투사였다. 3.1운동 당시 교사로 있으면서 경성애국부인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9월 정신여학교 선배인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원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했으나 일제에 검거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비밀결사 애국부인회 김마리아사건 공판’, 조선일보 1920년12월18일)

‘빈대, 벼룩이 많지만, 빈대약 주는 고로 관계치 않사옵고, 또 잠도 잘 자나이다.’ ‘안경다리가 부러져서 실로 매서 쓰고 있다. 여기있는 동안은 견딜는지 모르겠다.’ 이 시절 어머니와 동생에게 쓴 편지다.

대구 감옥에 갇혀있던 1921년 6월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신마리아가 별세했다. 신의경은 3개월 뒤 출옥한 후에야 별세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월남 이상재는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구나’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신의경은 1924년 아펜셀러가 교장으로 있던 이화여전에 진학해 영문학과 사학을 배운 뒤 도호쿠대에 유학했다.

◇언론이 주목한 차세대 지도자

조선의 첫 제국대학 여성 졸업자인 신의경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는 신문,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인사였다.

파인 김동환이 낸 월간 ‘삼천리’(1932년 2월)는 경성의 5대 학교 졸업자들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이화여전 출신 중 신의경의 인물평을 자세히 실었다. ‘氏는 서울 태생이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 길쑥하게 생긴 氏는 몹시 활발해서 동무들 사이에 있어서 ‘말괄량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몹시 좋아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호의를 사게 된다.’

다음달 ‘삼천리’(1932년3월)에 차세대지도자 기획 기사를 쓰면서 신의경을 박인덕, 김필례, 김신실, 유각경, 홍애시덕과 함께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로 손꼽았다.

◇광복 후 첫 여성 의원

신의경의 이화여전 교수 생활은 2년 만에 끝났다. 신의경은 이후 학계보다 교육계, 종교계에 주력했다. 1935年부터 피어선성경학원 교사 및 부원장으로 일했고, 연동교회 여전도회장, 경기노회 여전도회장으로 일했다. 광복을 맞을 때까지 두 남매를 키우면서 교회활동에만 매달린 그는 1946년12월 미군정청 산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총90명)에 여성의원으로 참여, 1948년 5월까지 활동했다. 김규식과 정치 활동을 함께 하면서 그가 총재를 맡은 대한적십자사 창립위원과 집행위원, 그가 주석으로 있던 민족자주연맹의 부녀국장을 맡았다. 정부 수립 이후엔 피어선 성경학교, 정신학원(정신여중고), 정의학원(서울여대) 등의 교육활동과 교회 활동에 전념하다 1988년 타계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대진 한예종 총장이 외손자

신의경의 딸 박문희(91)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총재를 지냈다. 사위 김상찬은 상업은행장을 지낸 금융계 원로로 지난 9월 타계했다. 박문희·김상찬 부부는 2남을 뒀다. 큰아들 김웅진(69) 교수는 미국 신시내티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외대 정외과에서 가르쳤고, 둘째 아들 김대진(60)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손열음 김선욱 등 K클래식 스타를 길러낸 피아니스트이다.

◇참고자료

하늘과 땅 사이에서-순원 신의경 권사 전기,2001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학교선택체험기’, 동광 제18호, 1931년2월

‘5대학부出의 인재 언,파렛드’, 삼천리 제4권제2호, 1932년2월

‘차대의 지도자 총관’, 삼천리 제4권제3호, 1932년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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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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