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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누구나 ‘자유’를 말하지만, 누구의 ‘자유’가 우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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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해방” vs “남부 자치권 보장” 1860년 당시 美대통령 후보였던 링컨과 브레켄리지의 ‘자유’ 대립

조선일보

자유주의

에드먼드 포셋 지음 |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828쪽 | 4만5000원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주의자일까? 지난 5월 10일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던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자유주의자다”라는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적 역량이 부족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자유주의(liberalism)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혼란 때문이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보자. 지난 대선을 앞두고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던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그는 민주당 당대표가 된 후 지난 23일 윤석열 정부를 향해 “언론을 탄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헌정 질서 파괴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재명은 자유주의자일까? 자유주의자라면 어떤 자유주의자일까?

영국의 시사·경제 잡지 이코노미스트에서 30년 넘게 활약한 정치 전문 기자 에드먼드 포셋의 이 책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자유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비자유주의자들 역시 자유를 옹호한다고 이야기한다.

1860년, 남북전쟁을 앞두고 있던 미국. 혼란 속에 치러진 대선에 나온 네 명의 후보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리버티(liberty)’와 ‘프리덤(freedom)’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같은 단어를 제각각의 용법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리버티’란 노예 해방을 뜻했지만, 남부의 후보 존 브레켄리지에게 ‘리버티’란 각 주가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할 수 있게 하는 권리를 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유’를 둘러싼 견해 차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허버트 후버는 ‘질서 잡힌 리버티’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네 가지 프리덤’을, 마틴 루서 킹은 인종차별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국가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라는 단어나 개념에 집착하는 식으로는 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는 역사 속에서 활약한 수많은 자유주의자 정치인, 사상가, 문인, 언론인들의 생각과 행동, 판단과 실수 등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편이 효과적이다. 마치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보통법을 알기 위해서는 법의 조문이 아니라 판례를 읽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 판단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책에 ‘어느 사상의 일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포셋은 자유주의를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치적 ‘관행’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으로 인해 정치 질서가 뒤집혔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구체제 질서를 뿌리째 흔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는 그런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처음에는 전제군주의 자의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맞섰지만, 나중에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분출되는 대중의 진보적 요구마저 포용하는 유연성을 과시하며, 21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통사적인 관점으로 조망해보면 자유주의’들’이 지닌 공통점이 드러난다. 첫째, 사회 내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둘째, 권력을 불신하며 삼권분립 등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 셋째,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지향을 놓지 않는다. 넷째, 참정권과 같은 모든 이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존중한다.

스스로를 ‘자유주의 좌파’라 소개하는 포셋은 특히 넷째 요소를 강조한다. 모든 이를 향한 시민적 존중 덕분에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관행으로 진화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목표와 이상이 (...)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서구 사회 네 곳인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에 잘 정착해 있는, 자유주의가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정치 관행이다. 그러니 자유주의자라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포셋은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고 논쟁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제 Liberalism: The Life of an Idea.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철학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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