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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우루과이와의 축구 경기를 보며 떠올린 옛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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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우리나라와 우루과이 사이에 벌어진 월드컵 1차전은 승패를 떠나 멋진 경기였습니다. 당초 우루과이가 우세하리라는 객관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탄탄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이에 다소 당황한 듯한 우루과이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양 팀 모두 승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무승부도 무방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았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손흥민 선수를 비롯한 양 팀 선수들이 서로 진정으로 격려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우루과이가 제가 방문했던 나라 중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나라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영석


우루과이는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면적(한반도의 0.8배)이나 인구(350만 명) 면에서 작은 나라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남미 대륙 속의 유럽 국가로 불리며, 1인당 국민소득도 가장 높은 편입니다. 수도 몬테비데오는 세계의 수도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2011년 1월 총리 재직 시 우루과이를 공식 방문하여 호세 무히카(Jose Mujica)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무히카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좌익 무장 게릴라 출신으로 1960년대 게릴라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4년간 복역하였고, 1989년 정계에 입문해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수도 근교의 농가에서 거주하며 받은 급여의 90%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택 사업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소속 당에 기부하였습니다.

대통령의 그런 특이한 경력 때문에 저는 호기심을 갖고 만났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여름휴가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여름 별장에 있었습니다. 제공해 준 헬리콥터를 타고 그곳으로 가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벌판에서 뛰노는 소 떼였습니다. 대통령은 오찬에서 우루과이산 소고기, 오렌지와 포도주를 내놓았습니다. 자연 친화적으로 생산되는 우루과이산 농산품의 우수성을 열심히 자랑했습니다.

오찬이 끝날 무렵 무히카 대통령은 느닷없이 제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반 트럭에 저를 태운 뒤 손수 운전하여 인근 목장 이곳저곳으로 안내하였습니다. 들판에서 뛰노는 소 떼를 직접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경호원들은 당황하면서 조심스레 뒤따랐습니다. 당시 우루과이는 수년 전 발생한 구제역 때문에 소고기 수출이 중단되었다가 국제수역사무국(OIE)으로부터 구제역 청정 국가 지위를 회복하고, 다시 수출을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목표는 2012년 여수에서 개최되는 엑스포의 우루과이관에서 우루과이산 소고기 스테이크와 오렌지를 소개하고 그것을 계기로 한국 수출을 재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의 우루과이 방문 얼마 전에도 부통령 겸 상원의장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부통령에 이어 대통령도 한국 수출 재개를 위해 음주운전(?)까지 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노(老)대통령의 정성(?)을 감안하고, 어차피 육류를 수입하는 우리로서도 수출국 간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며, 수입 재개 절차를 촉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정으로 절차가 지연되는 바람에 여수 엑스포에 우루과이산 소고기는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2012년 12월 멕시코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 특사로 참석했을 때 우루과이 부통령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분과는 한국, 우루과이에 이은 세 번째 만남으로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절차 지연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했더니, 부통령은 한국 측에서 관심을 갖고 도와주신 것을 잘 안다면서 오히려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품위를 보여주었기에, 제겐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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