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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노동'과 '진짜노동'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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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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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인즈(John Keynes)는 1930년 발표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2030년이 되면 인간이 하루 3시간만 일하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비슷한 시기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일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은 학문을 통해 안목을 키우며, 자신이 좋아하는 여가 시간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라고 말한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한다. 그러기에 바람직한 일하는 시간은 하루 3, 4시간 정도다. 이러한 예측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전해 생산성이 충분히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번아웃에 시달릴 정도로 과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덴마크의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노동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비판을 담아 '가짜노동' (Pseudo work)을 연구했다. '가짜노동'은 조직에서 요구하는 업무, 노동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노동은 아닌 업무를 말한다. '가짜노동'을 하면 우리는 실질적인 일을 한다고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 바빠진다. '가짜노동'은 중요하고 긴급해 보일 수 있으며, 많은 이에게서 진짜 노동이라고 인정받고 심지어 칭찬과 명예가 따르기도 한다.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무직 노동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가짜노동'이 등장했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무의미한 노동 속에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여전히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요즘 들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만 하고 그 이상의 일은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성과 창출을 위해 일에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는 기존의 일하기 문화와 상반된다. 불황의 시대를 겪으며, 온갖 스펙을 쌓고도 취업 문턱이 높아 전전긍긍하는 청년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일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이렇듯 드러내야 하느냐는 비판과 당혹스러움이 대개의 반응인 듯하다.

한편, '조용한 퇴사'는, 팬데믹을 통해 재택근무를 경험한 노동자들이 가짜노동의 진실을 수면으로 떠올리는 움직임일 수 있다. 재택근무를 통해, 사무실에서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과연 중요한가, 출퇴근에 쏟는 에너지가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일어났고, '조용한 퇴사' 현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일해 온 방식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한 '조용한 퇴사'는 오랫동안 쌓여온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상위 1%가 전체 자산의 25.4%를 소유하고 있고, 독일은 35%, 미국은 40%에 이른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강화해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면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접근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조용한 퇴사' 현상은 과연 우리 사회가 자발적인 노동자들의 일에 대한 진지함이 작동할 수 있는 사회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조용한 퇴사'를 MZ 세대의 철없는 투정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불평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계기로, '가짜노동'을 '진짜노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일하는 방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아보자. 어려운 일이지만 그 노력의 끝에 이윽고 인간은 하루 3, 4시간만 일하고, 남은 시간을 문화와 여가를 즐기고 정치를 논하는 그런 삶을 누리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일보

강민정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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