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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한해 800명 숨지는데···“중대재해 예방, 기업 자율에 믿고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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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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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중대재해 예방체계를 ‘기업 자기규율’에 맡기기로 했다. 규제·처벌 대신 기업 노사가 스스로 진행하는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예방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자기규율에 따르는 ‘책임’이 부족하다며 비판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발표’ 브리핑을 열어 “사후적인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춰 4대 전략과 14개 핵심과제를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현재 OECD 38개국 중 34위인 1만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0.43)를 2026년까지 OECD 평균(0.29)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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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위험성평가’ 중심으로 자기규율


정부의 새 로드맵은 사업장 자체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기업의 자기규율을 강화한다는 게 핵심이다. 위험성평가란 노사가 사업장의 위험요소를 파악해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다. 노동부는 그간 중대재해 예방 행정이 규제·처벌 위주로 진행돼 기업이 스스로 예방역량을 키우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기업들이 안전역량 강화보다 처벌 회피에만 급급하면서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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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는 강제성이 없었던 위험성평가를 의무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예방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은 위험성평가가 의무화된다. 2024년엔 50인~299인, 2025년엔 5인~49인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사고를 분석할 수 있도록 2024년까지 ‘재해원인 분석·공유 매뉴얼’을 마련하고, 중대재해 발생 시 사고원인 등을 조사하는 재해조사의견서도 공개한다.

산업안전정기감독은 구체적인 안전보건의무 준수 여부 대신 위험성평가를 점검하는 방식으로 개편한다. 안전보건규칙도 처벌규정과 예방규정으로 분류해, 고소작업 추락방지 같은 필수 준수 사항만 처벌하고 예방규정으로 전환한다.

노동부는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도 안전보건의 책임을 지도록 했다. 노동자도 안전보건의 주체로 법령 등에 명시해 역할과 의무를 부여하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건설업노사협의체 등을 확대하기로 했다.

중대재해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건설·제조업, 하청업체 등 분야는 집중적으로 지원·관리할 계획이다. 2024년부터 중소기업에는 ‘진단-시설개선-컨설팅’ 패키지를 제공하고, 2026년까지 안전보건인력을 2만명 이상 양성한다. 건설·제조업에는 센서·웨어러블장비 등 스마트 안전장비 사용을 추진하고, 가장 잦은 3대 사고유형(추락·끼임·부딪힘)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을 8개로 특정해 특별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산업안전 패러다임 전환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일터의 안전 수준도 그만큼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노동부는 관계 법령을 정비하는 동시에, 현행 법령·예산에서 이행 가능한 과제는 당장 내년부터 시행에 나선다고 밝혔다. ‘사고’ 중심인 이번 로드맵에 빠진 ‘질병’ 관련 내용은 추후 별도로 마련한다.

노동계 “기업 봐주기 우려 크다” 비판


노동계는 로드맵이 기업의 ‘자기규율 의지’에 지나치게 기댄다며 비판했다. 기존의 규제를 폭넓게 완화하는 방향이라 실제 중대재해 감축에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사업장의 1%도 못 미치는 감독, 사망사고 외에는 작동하지 않았던 형사처벌, 사람이 죽어 나가도 말단 관리자 벌금 420만원으로 그쳤던 것이 한국의 규제와 처벌의 실상”이라며 “과연 얼마나 감독과 처벌을 집행해 왔길래 규제와 처벌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인가”라고 했다.

자기규율에 따르는 ‘책임’이 사고 발생 후 단계에 집중된 점도 우려가 나온다. 특히 중대재해의 책임이 분명해도 처벌수위가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로드맵은 “중대재해가 실제로 발생했더라도 그간 위험성평가에 기반해 예방노력을 다했다는 게 증명되면 수사에 반영한다”고 밝혔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는 “상습·반복, 다수 사망사고 등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확실히 하겠다”면서도 “재해 예방 핵심 사항을 중심으로 처벌요건을 명확화함으로써 법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한국노총은 “산재예방은 선택이 아닌 의무의 영역이며, 충분한 예방 노력에 대한 입증을 정부가 해주는 것은 잘못하면 산재 수사 봐주기 우려가 있다”며 “(중대재해법 개편은)고의와 반복된 사망사고에 대해서만 형사처벌하라며 기획재정부가 월권행위로 낸 시행령 연구용역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개악”이라고 했다.

이 장관은 “기업 부담을 줄여주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기업주 부담이 커지는지 줄어드는지나 처벌은 어떻게 할지가 아니라, 오로지 중대재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줄일지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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