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공공연한 비밀’ 할리우드 성폭력은 어떻게 기사가 됐나···영화 ‘그녀가 말했다’[리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할리우드 성폭력 문제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자 두 명의 취재기

‘#미투’ 운동의 출발 과정 다루며

성범죄에 관대한 문화 전반 고찰

경향신문

영화 <그녀가 말했다>의 한 장면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래’라고 말했어!(She said ‘Yes’!)”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한 사람이 ‘그녀가 결혼하자는 제안을 승낙했다’는 뜻에서 할 법한 말이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그녀가 말했다(She said)>에서 조디 캔터(조 카잔)는 다른 뜻으로 이 말을 하며 기뻐한다. ‘그녀가 기명 보도를 허락했다’는 뜻에서다. ‘그녀’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다.

영화는 와인스타인의 오랜 성폭력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캐리 멀리건) 기자의 취재 과정을 다뤘다. 두 기자는 2017년 10월5일자 신문에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십년간 성폭력 고발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보도 이후 100명이 넘는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와인스타인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미투(#MeToo) 운동의 시작이었다.

“20여년 전,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애슐리 주드를 페닌술라 비벌리 힐스 호텔로 초대했다. 젊은 배우는 업무적인 아침식사 미팅 자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와인스타인은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오게 했다. 그는 가운 차림으로 나타나 그녀에게 마사지를 해주겠다거나 자신이 샤워하는 걸 지켜봐달라고 했다. 주드는 인터뷰에서 이같이 회상했다”
-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 기자의 뉴욕타임스 2017년 10월5일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십년 간 성폭력 고발자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 기사의 첫 번째 단락


영화는 두 기자가 쓴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했다. <파니 핑크>에 출연하고 <비포 던> <아임 유어 맨> 등을 만든 마리아 슈라더 감독이 연출을, <서프러제트> <프라미싱 영 우먼> 등 여성 인권을 다룬 영화에 여러 번 출연한 캐리 멀리건이 <왓 이프>의 조 카잔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실제로 와인스타인의 고발에 함께했던 배우 애슐리 주드는 영화에서 자신을 직접 연기했다.

한 사건을 보도한 기자들의 취재기를 담은 만큼 영화는 <스포트라이트>를 연상시킨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사제 명단이 담긴 문건이 필요했다면, <그녀가 말했다>에서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중요하다. 슈라더 감독은 “무척 내밀한 것과 꼭 알려져야 하는 것의 만남과 붕괴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당시 연예계에서 성폭력 고발은 ‘삼류 섹스 스캔들’ 정도로 여겨져 가해자보다 피해 여성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다. 할리우드를 주무르는 거물이던 와인스타인은 자신을 거절하거나 고발하려 했던 여성들을 작품에서 배제했다. 그의 눈밖에 나는 것은 업계 퇴출을 의미했다. 여성들은 말해봤자 손해이며 바뀌는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그가 내민 합의서에 서명했다. 여성들은 두 기자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속내를 털어놓더라도 보도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피해 사실이 단편적으로 기사화된 적이 있다는 사실도 걸림돌이었다. 공공연한 사실은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사소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배우는 “나는 예전에 뉴욕타임스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놨지만 그 기자는 ‘스타일 면’에 내 기사를 썼다”며 캔터와 투히의 취재에 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경험을 한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두 기자는 와인스타인의 ‘패턴’을 파악하고 몇몇 기명 증언을 바탕으로 이를 폭로하는 기사를 작성한다. 끊임없는 취재와 설득, 여성들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의 중심에는 저널리즘이 있다. 실제 메건 투히는 “우리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우리는 기자”라며 “다만 진실을 폭로하고 문제를 알린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폭력도 보도했던 투히는 ‘어떻게 여성들의 입을 열게 했냐’고 묻는 캔터에게 이렇게 답한다. “솔직하게 말했어. 당신이 과거에 겪은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힘을 모으면 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투히와 캔터는 ‘우리가 당신을 돕겠다’거나 ‘분명히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린다.

영화는 할리우드에 만연한 성폭력이 와인스타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법조계는 성범죄자와 피해자를 합의시키는 대가로 합의금의 40%를 수임료로 가져갔다. 고발보다 합의를 종용하는 건 당연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도 취재에 협력한 피해자 로라 매든(제니퍼 일리)은 “이건 성범죄자를 비호하는 사법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밖에 배우를 호텔로 보낸 에이전트들, 와인스타인의 비행을 알고도 쉬쉬한 감독과 언론인들 모두 공범이었다.

영화는 여성 문제를 세심하게 다룬다. 강간이 어른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입에서도 농담처럼 오르내릴 정도로 만연한 문제라는 점이 언급된다. 투히가 산후우울증을 앓는 과정, 투히와 캔터가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모습이 화면에 담긴다. 반면 성범죄 장면, 와인스타인의 정면 모습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처럼 실제 여성들은 가느다란 희망과 연대의 마음으로 이름과 얼굴을 밝히고 증언에 나섰다. 여러 증언이 모여 매일 일어난다고 해서, 흔하다고 해서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와인스타인은 징역 23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며 두 기자는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와인스타인 사건 4년 후인 지난해, 미국인들은 미투 운동이 미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더 많은 회사들이 권력형 성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AP통신과 NORC공공문제연구센터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여론조사에 응한 1099명 중 54%는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경우 더 목소리를 낼 것 같다’고 답했고, 58%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 증인으로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영화 제목과 영어 표현(She)을 고려해 그/그녀를 구분했습니다.


☞ [책과 삶]침묵의 벽 무너뜨린 ‘미투 탐사보도’ 그리고 그녀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108201139001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걸음’ 여성들의 이야기 공간
▶ ‘눈에 띄는 경제’와 함께 경제 상식을 레벨 업 해보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