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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퍼졌다"···러軍 속여 병원 지킨 우크라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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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 직후 점령됐다가 8개월 만에 수복된 헤르손의 한 병원 의료진이 병원을 지키기 위해 수개월간 러시아군에 맞선 사연이 전해졌다.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크라이나의 남부 요충지 헤르손 점령 직후인 지난 3월 러시아군이 트로핀카 병원에 들이닥쳐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리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의료진의 저항을 조명했다.

이 병원의 책임자인 레오니드 레미가(68) 박사는 출입문 위에 걸린 국기를 내리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당신이 원한다면 나를 쏠 수 있겠지만 국기는 내리지 않겠다”고 맞섰다.

당시 러시아군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돌아갔지만, 이 만남은 러시아군이 헤르손 점령 기간 내내 병원 통제권을 놓고 의료진과 벌일 싸움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의사를 구금하고 모든 우크라이나 상징물 사용을 금지했으며 자신들이 뽑은 사람을 병원 책임자로 앉혔다.

헤르손주의 주도 헤르손시는 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점령한 유일한 지역 수도로 침공 전까지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이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헤르손 점령이 이 지역에서 해방으로서 환영받거나 최소한 저항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야로슬라우 야누셰비치 헤르손주 주지사는 “그들은 상상 속에서 모든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 반대였다”고 말했다.

1914년에 설립된 트로핀카 병원은 5층짜리 본관과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다.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1991년 이후 인프라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시설과 장비가 낙후됐다.

시의원 출신으로 1995년부터 이 병원에서 수석의사로 일해온 레미가 박사는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서방과 함께 있다고 믿어 침략이 시작됐을 때부터 병원이 러시아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레미가 박사가 국기 내리기를 거부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장갑차를 타고 병원에 들이닥친 러시아 군인들이 트로핀카 병원을 군 병원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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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가 박사는 코로나19 방호복 차림으로 이들을 맞이했고, 코로나19로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미리 병원 벽을 감염에 대한 경고문으로 도배해 놓은 상태였다. 이들의 기지로 병사들은 병원을 떠났다.

그 후 몇 주 동안 의료진은 부상당한 러시아 군인들과 최전방 마을의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지난 4월 박사의 아내와 아들, 손자는 점령되지 않은 지역으로 떠났지만 레미가 박사는 병원에 남았다. 그는 “우리 병원이 러시아 병원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모든 직원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러시아군은 레미가 박사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은 종종 그의 앞에 나타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레미가 박사는 두 남성이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의 직원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트로핀카 병원은 늘 인슐린이 부족했기 때문에 레미가 박사는 그들의 제안을 이용했다. 그러면 두 남성들이 금방 인슐린을 갖다 주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가 최루가스와 경찰봉 폭행 등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사그라들면서 러시아는 헤르손과 병원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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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이 임명한 헤르손주 보건장관은 6월 7일 레미가 박사를 소환해 물러나라고 명령하며 라리사 말레타 수간호사(51)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이날 레미가 박사는 항의하다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다.

말레타 수간호사는 “나는 의사가 아니다”라며 병원 책임자 자리를 거부했으나 레미가 박사가 자신이 돕겠다며 병원에 남아달라고 부탁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날 밤 말레타 수간호사는 우크라이나 보안기관에 전화를 걸어 병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고 자신은 러시아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려웠다. 병원 직원의 80% 정도만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20%는 날 부역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이후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리는 등 겉으로는 러시아의 요구에 따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와의 계약을 거부하는 등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수간호사는 러시아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지난 8월 가족을 남겨둔 채 타 지역으로 탈출했고, 뇌졸중에서 회복한 레미가 박사도 이튿날 아침 병원을 빠져 나왔다.

레미가 박사는 도피 생활을 하다가 9월 20일 러시아군에 붙잡혀 투옥됐다. 비좁은 감옥에서 그는 매일 아침 다른 죄수들과 어깨동무하고 “러시아에 영광을, 푸틴에게 영광을”이라고 외치며 러시아 군가를 불러야 했다. 그는 병원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주일 후 석방됐다.

10월이 되자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러시아가 헤르손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며칠 전, 관리들은 의료 장비를 훔치기 위해 병원에 나타났다. 병원 직원들은 컴퓨터를 집으로 가져갔고, 의사는 고가 장비의 리모컨을 숨기거나 고장난 것처럼 꾸미는 방법으로 장비들을 지켜냈다.

마침내 러시아군은 점령 8개월여 만인 지난 10일 헤르손에서 퇴각했고 다음날 우크라이나군이 도착했다. 레미가 박사가 돌아온 뒤 병원에는 다시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렸다.

그는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460명이던 병원 의사가 지금은 70명밖에 남지 않았다”라며 “하지만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헤르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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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인턴기자 mic.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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