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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직설] 무엇이 빈곤을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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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면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았어.” 고작해야 24살, 단칸방에 살면서 변변한 기반 없는 아빠랑 왜 결혼했냐는 물음에 나온 엄마의 답이다. “사랑했으니까” 같은 낯부끄러운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멋없는 대답일지는 몰랐다. 사실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다. 가장 작은 경제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인 ‘가족’을 남과 꾸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더군다나 여성 가구주의 빈곤율이 남성 가구주의 빈곤율보다 월등히 높은 이 나라에서, 엄마의 경제적 선택으로서의 결혼 이유는 더 무겁게 다가온다.

경향신문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엄마의 결혼 이유를 뒷받침하듯 빈곤한 여성 가장들의 죽음은 계속 이어진다. 지난 23일, 신촌에서 생활고를 이유로 두 여성의 삶이 또 스러졌다. 2022년 11월 신촌 모녀, 8월 수원 세 모녀, 2020년 창원 모녀, 2019년 성북구 네 모녀와 또 같은 해 등록금 고지서를 남기고 죽은 장성군 모녀,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까지. 지금 떠오르는 여성 가장의 빈곤으로 인한 사망 사건을 나열한 것만 이 정도다.

‘모녀’라는 단어 앞에 붙은 지역 이름만 다를 뿐, 사건의 양상도 그들이 생을 마감하고 남은 자리도 비슷하다. 빈곤이 개인적인 일이라면 똑같은 양상으로 많은 모녀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 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은 전체 연령에 걸쳐 40.1%로 나타났다. 남성 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이 13.6%인 것을 생각하면 확연한 차이다. 노인으로 갈수록 여성의 빈곤율은 더 높아져 65.1%에 이른다. 이런 곳에서 ‘굶겨 죽이지 않을 것 같아서’ 결혼 상대를 찾은 당시 엄마의 선택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 여성은 더 빈곤한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임금 격차, 임신과 육아 등으로 단절되고 나면 회복되지 않는 경력, 남편 혹은 아버지의 가출·이혼·사별 등을 겪고 나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여성에게 남는 것은 빈곤이라는 늪이다. 장애나 질병이 있다면 더 빠져나오기 힘들다. 빈곤이라는 굴레다.

이런 빈곤의 늪지대에서 복지 제도는 여전히 ‘발굴’만을 문제 삼고 있다. 정부는 위기가구 발굴을 위해 위기 정보를 현재 34종에서 44종으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신촌 모녀는 이미 위기가구 대상이었다. 참여연대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에서 2021년 사이에 발굴된 지원 대상자의 4%만이 기초생활보장제도 혜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발굴만을 문제 삼는 동안 복지 제도를 신청하지도 못하거나, 신청해도 까다로운 기준 때문에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빈곤 사망 사건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더는 “왜 발견하지 못했는가”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무엇이 빈곤을 만드는가” “제도는 빈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여야 한다.

24살의 나이로 결혼을 결심한 엄마의 가장 큰 불안은 무엇이었을까.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할 고민은 무엇일까. 집 한 채 없이 케첩과 커피믹스, 2인분의 쌀만으로 내일을 걱정하는 삶일지, 시가 30억원을 호가하는 집 때문에 종부세를 걱정하는 삶일지. 적어도 나는 빈곤할 나의 노년이 두렵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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