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서소문 포럼] 무전기를 함께 썼던 한·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오래전에 물러났던 전직 국방장관이 장교 시절 경험했던 일화이니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얘기다. 한국이 없이 살던 시절이었다. 한·미 부대가 함께 훈련하던 중 한국군 부대 무전기가 고장이 나 미군과 통신이 쉽지 않았다. 미군 지휘관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자연스레 무전기 불량으로 인한 고충을 알려줬더니 자기가 어떻게 알아보겠다고 했단다. 몇달 후 정말로 이 미군 지휘관이 하와이에서 무전기를 조달해와 한국군에 제공했다. 전직 장관이 “그땐 한·미가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미군 비품을 우리 것처럼 여기며 썼다”면서 들려준 경험담이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훈훈하지 않다. 한국의 몸집이 커진만큼 주둔 비용을 더 대고 국제적으로도 더 역할을 하라는 게 미국 요구이고, 한국은 평택 험프리스만한 미군 기지가 전 세계 어디에 있느냐며 매번 줄다리기한다.

그런데도 수십 년 전 무전기 에피소드를 꺼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 하는 한·미 관계의 특징이 여기에 담겨 있어서다. 한국군이 미제 무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이임을 뜻한다. 같은 주파수에 있으니 무전기를 공유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군서 무전기 받아 썼던 한국군

정보공유 가능한 동맹 관계 상징

북한 안 바뀌면 미군 철수는 불가

중앙일보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무전기 공유를 확대하면 무기체계 공유가 된다. 한국군 비축탄을 미국이 수입할 수 있는 건 미군이 그 탄을 그대로 쓸 수 있어서다. 미군 F-16은 한국군에선 코리아의 K가 붙어 KF-16이 된다. 한국이 다시 불곰사업을 일으켜 러시아제 T 시리즈 최신 탱크를 들여와도 피아 식별이 최우선인 실전 운용에선 제한이 있다.

같은 무기체계라는 특징이 효과를 본 게 이번 폴란드 무기 수출이다. 폴란드에 대규모 방산 수출을 가능하게 해준 출발점은 러시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쳐 들어가면서 인접국 폴란드에 ‘다음은 우리’라는 강렬한 충격을 줬다. 폴란드는 당장 전력 증강이 필요했고, 이참에 구소련제 무기 체계에서 나토 무기 체계로 탈바꿈을 시도했다. 폴란드는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었다. 이런 폴란드에 한국의 K-9 자주포, K-2 전차, FA-50 경공격기가 들어간다. 폴란드에 ‘당장, 안정적으로, 대량으로, 가성비가 있으면서’ 동시에 ‘나토 무기체계에 부합하는’ 무기를 공급할 나라는 그간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면서 무장을 갖추고 전쟁 투입 훈련을 계속해온 한국 정도였다.

외교·안보는 철저하게 현실의 이익 논리에 맞춰 작동한다. 프랑스가 뜨면 영국과 유럽 대륙 전체가 나폴레옹 차단을 위해 손을 잡고, 고구려가 남하하면 나제동맹이 만들어진다. 불과 수년 전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던 백악관이 원유 수급 불안에 봉착하자 슬그머니 베네수엘라에 가했던 원유 수출 제재를 풀어주고 있다.

한·미 관계에서도 대원칙은 상호 이익이다. 한·미 동맹의 접착제는 동맹이 한국에도 미국에도 모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미군 주둔에 돈을 대고 국제사회에서 미국 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미군을 인계철선 삼아 제2의 남침을 차단하면서 나라의 자원을 교육과 경제 인프라 구축에 돌릴 수 있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자유주의 시장 블록에도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미국 역시 동북아 지상군 주둔으로 중국의 진출을 막고, 역내 미국 영향력을 유지하는 방파제를 구축했다. 양국 이익의 교집합이 만들어진 가운데 전력증강사업에 매진해 왔던 한국은 방산 수출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

무전기 동맹이 50년, 100년 후에도 지금처럼 유지될까. 그때도 한·미가 국익을 공유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지금 명확히 따질 건 우리가 누구와 무전기를 공유할 수 있는가다. 주말마다 도심을 마비시키는 윤석열 정부 비난 집회에 ‘미군 철수’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식이 있다면 답은 나와 있다. 지금 북한은 대화를 거부한 채 핵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위협하고 있다. 한때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던 북한은 이젠 공식적으로 “후대에 ICBM을 남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일관되게 연합훈련 중단, 주한미군 철수, 한·미 군사동맹 해체를 요구한다. 북한은 남한에서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런 주장을 던진 뒤, 남한 정부가 일축하면 대놓고 핵 개발을 했고, 이를 받아들여 대화에 나서면 비밀리에 핵 개발을 했다. 지금은 백두혈통 대대로 핵 무력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예고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무전기를 함께 쓴다면 누구와 할지는 답이 나와 있다. 북한이 이른바 민족해방, 즉 적화통일과 핵보유국이라는 목표를 바꾸지 않는 한 한반도의 대결 구도는 해소되지 않고 미군도 뺄 수 없다. 이를 부인하면 둘 중 하나다. 뻔히 알면서 세상을 속이려 하는 것 아니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