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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윤 대통령의 자유는 ‘전국민 서바이벌게임’의 다른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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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겨레

화물연대 총파업 닷새째인 28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ICD)에 화물차들이 멈춰 서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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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 | 여성학 연구자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알리자마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눈앞에서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반대편 차선에서 거대한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사력을 다해 핸들을 꺾었다. 다행히 뒤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잠깐 갓길에 차를 세웠다. 중앙선을 넘어오던 화물차는 다시 차선을 찾아 빠앙 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택시기사와 나는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담배 한대만 태우고 가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 차에 나도 차 밖으로 나와 잠시 숨을 골랐다. 방금 정말로 죽을 뻔했구나.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기사가 꺼낸 말이 의외였다. 화물차 운전기사들 쉬지를 못해서 저러는데 대책이 좀 있어야 해요. 저 사람들은 졸음하고 싸우고 우리는 화물차만 보면 긴장해야 하니….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한마디씩 하는 그 기사의 얘기가 그 뒤로 오래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화물차 기사들의 쟁의 소식이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화물차 기사의 안전운행은 도로에 나온 우리 모두의 안전 문제와 직결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여행을 다닐 때 국경을 넘어가는 장거리 버스에 운전기사 두명이 탑승해서 교대로 운전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노동시간 때문이라고 했다. 고속도로가 텅 비어 있어도 시속 80~100㎞ 속도를 내내 유지하는 것도 신기했다. 법에 규정돼 있다고 했다. 시내를 운행하던 버스에서 갑자기 불을 끄고 기사가 내려버려 당황한 적도 있다. 버스기사의 법정 휴식시간 때문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이미 익숙해 보였다.

이 모든 조치는 유럽연합에서 2006년 제정된 561/2006 법 이후에 가능해졌다. 2012년부터 자영업자에게 확대 적용된 법인데, 아주 세세하게 운전기사의 휴식시간과 주당 근로시간, 연속운행 가능일수 등을 규정하고 있다. 법만 만든 게 아니라 법의 실질적 작동을 위한 후속 조치와 예산 배정이 뒤따랐다. 대형버스 및 화물차량의 운행기록장치에는 버스기사의 카드가 등록되고 휴게시간까지 관리되는데, 이 기록을 경찰이 요청하면 즉시 제출해야 하고 위반사항이 반복되면 단기운행정지부터 면허취소까지 제재가 이뤄진다.

이게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임금체계다. 독일의 버스노조에서는 기사들이 어떤 회사에 소속돼 있는지와 무관하게 동일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단체협약을 확대하고 있다. 굳이 과속, 과로, 과적하지 않아도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데 유럽연합, 지방정부, 경찰, 노동조합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8년 이후 유럽연합의 교통정책은 국가간 원활한 통행, 여객과 화물 수송의 극대화, 교통 이용에서의 차별 방지, 기후위기 시대에 발맞춘 에너지정책, 교통안전 및 보안을 위한 표준 개발 등의 목표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의 노동권과 시민의 안전은 정부가 동시에 추구해야 할 목표이지 성장과 효율을 명분으로 뒤로 물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정부는 자유시장경쟁에 맡겨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듯하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대응으로 윤석열 정부는 업무개시명령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한다. 노동조합에 격앙된 분노를 표출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생명과 생존을 내건 경쟁에 모두를 몰아넣어 버리는 것은 서바이벌게임이지 자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주입하는 각자도생의 세계관은 사기극일 뿐이다.

화물차 기사의 안전한 근무환경이 당장 도로에 나온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각자도생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올해 내내 혼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비극적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고, 한달 전에는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이 예측가능한 혼잡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무책임한 정부 행정으로 인해 숨졌다. 막을 수 있는 사고를 막는 건 정부에 기대하는 ‘기본적인’ 기능이다.

정부가 안전운임제를 지속하면서 협상해야 할 일은 과적과 과로, 과속을 막기 위한 더욱더 실질적인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지 안전운임제 자체의 지속 여부여서는 안 된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이름의 전국민 서바이벌게임을 당장 멈추고 해야 할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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