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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태원 참사 한달… ‘지시’ 없인 움직이지 않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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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핼러윈 인명사고 관련 지난 10월30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상황실에서 열린 긴급 상황점검회의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으로부터 보고받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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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

지난달 29일 이태원의 핼러윈 ‘축제’는 젊은이 158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됐다. 태풍이 덮치거나 다리가 무너진 게 아니다. 서울 한복판 길 위에서 사람들이 몰려 넘어지고 눌려서 숨을 쉴 수 없게 됐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13만명이 운집한 이태원에 겨우 경찰 137명을 배치하고 그도 대부분이 마약단속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비판에 대한 대응이다. 국민은 할 말을 잃었다.

장관의 말이 뭇매를 맞자 다른 이들도 나섰다. 경찰청 관계자는 “주최측 없는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행사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고, 용산구청장은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내용도 없고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국무총리는 “주최측이 없으면 경찰은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고 바통을 이어갔다.

경찰청이 공개한 112 신고 내역에 따르면, 그날 오후 6시34분에 압사라는 말이 들어간 첫 신고가 접수됐다. “너무 불안하다.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당할 거 같다. 통제 좀 해 주셔야 될 것 같다”라고. 그 이후에도 70여 건의 신고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왜 담당 공무원들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정하되 그 조치방법은 자율에 맡기는 ‘목표기반 규제’와 조치방법을 구체적으로 일일이 정해주는 ‘지시적 규제’를 비교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첫째, 지시적 규제의 경우 담당자들은 위험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이를 통제하려는 노력보다 주어진 규정이나 지시에 의존하고 규제를 피할 궁리를 먼저 한다. ‘이날 이태원에 10만이 넘는 인파가 몰릴 것은 쉽게 예견이 될 수 있는 상황이어서 지자체와 경찰이 인파통제, 도로통제 등을 했어야 마땅하고, 오히려 주최측이 없을수록 행정과 경찰력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상식에 맞는다. 현장에 있는 일반 시민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를 경찰은 오히려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했다.

둘째, 지켜야 할 사항을 구체적으로 일일이 정하는 것이 지시적 규제의 특성인데, 아무리 촘촘히 규정해도 사각지대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매뉴얼에 주최자가 없는 행사를 포함하면 일단 해결되겠지만 상황이 변하면 또 다른 틈이 생긴다.

셋째, ‘지시’에 의존하는 시스템에서는 보고체계가 왜곡되고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는 시간이 지연된다. 이번 경우 대통령이 참사 46분만에 가장 먼저 보고를 받았고, 행정안전부 장관이 1시간5분 만에, 경찰청장은 1시간59분이 지나서야 보고받았다. 보고가 역순으로 된 것이다. 현장에서 최고 권력자의 지시를 기다린다면 조치는 그만큼 더 느려질 것이다.

바둑에서 정석은 외우고 잊어버리라고 한다. 일정 수준까지는 정석이 도움되지만 고급자가 돼갈수록 정석에 매달리면 승산이 떨어진다. 상황 변화와 상대방 전술에 ‘적절하고 충분하게’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규제와 지휘체계가 효율적이던 시대가 아니다. 고급자가 되기 위해서 수평적 조직문화와 창의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곳은 생산현장만이 아니다. 잘못된 매뉴얼은 바로잡는 게 맞다. 더 중요한 건 상황에 따라 신속한 판단과 대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규제에 자율책임을 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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