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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나무가 주인공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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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꾼 솔밭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대구 미래농원(mrnw).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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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가을 학회가 열린 대구에 하루 먼저 도착한 건 순전히 정원 한곳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대구 금호강 북쪽 교외에 자리한 미래농원(mrnw)이 대구의 신상 핫플로 뜨고 있다. 도심 번화가나 북적이는 ‘〇리단길’에 있는 것도 아닌데 ‘오픈 런’을 해야 할 정도다. 농원이라는 이름처럼 이 땅의 주연은 원래 나무였다. 나무 심고 돌보는 취미를 가진 아버지가 20년간 가꾼 농원을 아들이 물려받아 정원과 전시장, 카페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용도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오랜 세월 장소의 주인공이었던 나무들은 그대로다. 도시 공간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숲에 가까운 밀도와 양의 나무가 이방인을 환대한다.

시간이 만들어낸 숲이다.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서기 전, 정성껏 가꾼 소나무밭에는 6m 넘는 키 큰 소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감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무화과나무도 풍성했다고 한다. 새 미래농원을 설계한 조경가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은 “수목들을 그대로 살리고 위치를 최소한으로 조정하면서 동선을 짜고 영역을 나누는 게 설계의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건축가 강예린과 이치훈(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의 설명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주인공인 땅에 건축이 자리하는 방법, 즉 자연과 건축이 관계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 설계의 시작점이었다.”

견고한 경계 안에 담긴 경이로운 정원이다. 밖에서 보면 옅은 분홍색 콘크리트 담과 건물 벽이 폐쇄적인 느낌을 주지만, 좁은 입구를 지나면 잘생긴 두그루 감나무와 노란 모감주나무가 내밀한 정원으로 발걸음을 이끈다. 어수선한 주변 경관과 도로의 소음을 높은 담과 수벽으로 차단한 소나무숲, 상상하지 못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판타지 영화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길을 잃은 듯한 착각이 든다.

공간이 중첩되면서 계속 연결된다. 옛 미래농원 소나무밭 속에 타원형과 직사각형 건물 두동을 새로 넣었다. 전시장으로 쓰는 타원형 건물은 규모와 수종이 똑같은 쌍둥이 중정을 대칭으로 품고 있고, 직사각형 건물의 중앙은 타원형 중정이다. 인스타그램에 ‘#미래농원’으로 검색하면 쏟아지는 사진들, 바로 이 시그니처 공간에서 찍은 것들이다. 지면부터 하늘까지 뻥 뚫린 광창으로 자연의 빛이 내린다. 건물에 엮인 텅 빈 중정이 아버지의 옛 정원과 빽빽한 솔숲 정원으로 연결된다. 넓지 않은 실내 공간이 외부의 숲으로 확산하면서 공간감이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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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하늘까지 뚫린 광창으로 자연의 빛이 내린다. 미래농원의 시그니처 중정.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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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는 자연이 아니라 머물며 감각하는 자연이다. 땅의 주인공이었던 소나무들을 거의 그대로 남긴 정원, 화려한 장식으로 시선을 붙잡지 않는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질감으로 공감각을 자극한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날렵한 철제 브리지가 거친 솔숲 사이를 가로지르며 산책길을 만들어낸다. 지면에서 떠 있는 이질적 물성의 동선이 공간에 깊이와 자유를 준다. 느릿하게 해찰하다 머무를 의자가 풍성하다. 옛 헛간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면 솔숲을 가득 덮은 하늘과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

전시와 공연, 식음 기능을 묶은 복합문화공간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부산의 F1963, 인천의 코스모40, 서울의 문화비축기지처럼 수명을 다한 공장, 버려진 창고, 폐기된 산업시설의 구조와 재료를 되살려 쓰는 재생건축 형식을 취하는 게 대세다. 이런 흐름에 레트로 열풍까지 가세해 크고 작은 상업건축에서도 이제 재활용이 불문율처럼 여겨지거나 장식적으로 모방되기도 한다. 반면 대구 미래농원은 수목을 그대로 살려 쓰고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점에서 이채롭고 신선하다.

미래농원은 개방된 개인정원이다. 하지만 많은 방문자에게 장소의 기억과 시간의 흔적이 압축된 자연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공정원의 가능성도 지닌다. 도심에서 멀고 커피값을 내야 함에도 미래농원의 솔숲 정원으로 젊은 세대가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후기를 보면 단지 근사한 인스타용 사진을 건질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된 미래’ 농원의 자연이 주는 위로와 여유에 엠제트(MZ)세대가 공감하는 것 같다”고 조경가 박승진은 말한다.

아쉽게도, 한필지 건너편 ‘괄호의 정원’을 산책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농원 시절에 뒷밭이라 불리던 이곳은 옛 숲에 목재데크와 작은 수조, 야생화로 최소한의 질서만 새로 부여한, 정원 안의 정원이라고 한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다시 대구에 갈 구실이 생긴 셈이다. 이번에는 탐사의 촉을 내려놓고 뒷밭 향나무숲 빈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을 잃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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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을 그대로 살려 쓰는 게 설계의 핵심이었다. 대구 미래농원.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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