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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은퇴·노화의 초조한 내면…“다 지나갔다” 그 말이, 콱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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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은퇴 뒤 겪은 허전함

큰 변화인 은퇴를 맞고…‘잘나가던 때’ 못 놓는 마음

회피 말고 ‘지금, 여기’ 집중, 새로운 세상이 기다려


한겨레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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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은퇴가 예정된 2016년을 한달 남기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퇴임을 앞두고 있던 저는 뜻밖에 닥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온갖 미련, 후회,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올라오는데 그걸 깊이 나눌 친밀한 사람이 곁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두어주 만에 저는 이임식을 마치고 오랫동안 익숙했던 회사에 더는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매일 출근하며 내 삶의 무대였던 사무실은 없어지고 주말에 늘 찾아뵙던 어머니 댁도 없어진 것이지요. 실은 은퇴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어머님도 더 이상 오래 버티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고 생경했습니다. 마치 여태껏 살던 지구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행성으로 옮겨진 듯했습니다.

은퇴 뒤 일상을 아웃소싱하던 생활에서 다시 인소싱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참 어색했습니다. 엊그제까지 익숙했던 환경과 처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현실은 참으로 어색했습니다. 스스로 차를 운전하니 느리고 조심스럽고 불안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현직에 있을 때는 회사 안팎에서 누구나 내게 예의 바르게 대해주고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나오고 나니 일상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지도 않고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당혹감과 불편함까지 느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은퇴 뒤 상황이 좋은 형편이었음에도 내 몸과 마음은 여전히 내가 익숙했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그전 같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모교인 대학에서 초빙교수직을 맡아서 한 학기에 한 과목씩 강의를 했습니다. 젊은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나름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흡족하진 않았습니다. 학생도, 교수도, 재단도 각자 자기 눈앞의 이익 외에는 학교 커뮤니티의 미래에 관한 꿈도, 소명감도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한 금융회사의 사외이사직도 맡았는데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거수기 역할은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주식회사가 이사회 중심으로 경영되는 모델을 실현해보겠다고 최선을 다했지요. 이러한 활동이 물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내 마음속 한편에는 ‘내가 아직 사회적 쓸모가 있다. 난 아직 살아 있다’ 이런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2년을 보내면서 차차 들기 시작한 의문이 내 삶이 여전히 남들에 의해서, 사회적 기대에 의해서 계속 꾸려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삶에 대학 초빙교수, 금융회사 사외이사라는 지위와 명함이 정말 더 이상 필요한 건가?’ 하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두 역할 모두 상당 기간 더 할 수 있었지만, 그럼 그 뒤에는? 뭔가 또 다른 자리를 찾는다? 얼마나 오래 할 건데? 3년 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뭔가 내 삶의 중심이 분명치 않다는 느낌이었지요. 답답했습니다. 그게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마치 연명치료하듯이 과거 삶의 패턴을 이어나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지요.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두곳 모두 사임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할 바는 다했다, 더 이상 내 생활을 이런 방식으로 꾸려나가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빙교수와 사외이사를 막상 모두 내려놓고 나니 엄청난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더 이상 학생에게도, 조교에게도, 이사회 사무국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내게 의견을 묻거나 찾아오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후회마저 몰려왔습니다. 몸이 여기저기 불편해지는 것과 더불어 에너지 레벨이 날로 떨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기운이 없고, 의욕이 없고, 에너지가 바닥이었습니다. 딸·아들네 가족을 보러 미국엘 갔다가 일정을 당겨 돌아왔고 유럽여행을 예약했다가 큰 손해 보고 다 취소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하던 일들을 내려놓았는데 막상 그리하고 보니 막막하고 암담했습니다.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왜 그전 같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하는 나에게 상담 선생님은 “다 지나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마음에 와서 콱 꽂혔습니다. ‘다 지나갔다고? 정말 그런 건가? 그럼 나는 마치 과거가 다시 올 것 같은 착각 속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지금 여기는 어딘가? 나는 뭔가?’라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노화에 초라하지 않은 이 없어


티브이 드라마에 소위 ‘삼식이’ 얘기가 나왔습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가장을 가족들이 별로 반기지 않는 것이지요. 평생 직장에서 일하고 가족을 부양한 자신이 은퇴 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밖으로 돌게 됩니다. 나름 소일거리와 취미생활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헛헛합니다. 그런데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남편을, 아빠를 포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회사와 일에만 열중하고 가족들과 눈맞춤할 시간을 갖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은퇴와 더불어 돈과 지위로 가장 역할을 해온 자신의 정체성에 위기가 온 것이지요. 이제 각자와 눈맞춤을 하면서 그 관계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눈맞춤을 하면서 사랑을 되찾아야 합니다.

은퇴하고 노화를 겪으면서 그 누구의 삶도 내면에서 불편하고 초라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걸 잘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돈과 지위와 권력이 그걸 잠시 가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서 강을 거쳐 바다로 가서 그와 섞여서 바다가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올해 초에 입적하신 틱낫한 스님이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I am home. I have arrived.”(아, 집에 왔다. 드디어 도착했다.) 진실로 과거도 미래도 오직 내 생각 속에서만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떠나서 유일한 나의 현실인 ‘Here and Now’, ‘지금, 여기’에 도착해야만 하겠습니다. 은퇴와 노화라는 나의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 그러면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책 〈경영은 사람이다〉, 〈회사에서 안녕하십니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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