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실크로드보다 와인이 먼저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뉴시스

[서울=뉴시스]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 일행의 모습을 담은 ‘장건출사서역도’.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뉴시스] 투루판을 떠나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오아시스 길을 따라가던 장건은 쿠차(구자, 龜玆)에 들렸다. 이곳에는 이미 포도밭과 와인이 있었다. 불교도 전파돼 있었다. 훗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8세기 신라의 혜초 스님도 인도로 가던 중에 거친 곳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는 인구 몇만명 단위의 크고 작은 36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 중 성곽을 쌓고 정착 농경을 하던 나라는 ‘거국’(居國), 유목국가는 ‘행국’(行國)이라 불렸다. 당시 쿠차나 소륵(疏勒, 오늘날의 카슈가르)과 같은 천산남로 주변국들은 흉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한나라 사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장건은 오아시스 길에 들어선 후에는 말과 식료품 등을 조달할 수 있었다.

장건은 교통의 요지인 소륵을 지나 200㎞ 떨어진 파미르 고원에 도착한다. 파미르 고원의 북동쪽은 텐샨 산맥이, 동쪽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남동쪽에는 쿤룬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이 고원을 둘러싸고 있다. 평균고도가 6100m나 될 정도로 높고 험난하다. 한나라 때에는 야생 파가 많이 난다고 해서 ‘총령’(蔥嶺)이라 불렸다.

파미르에는 여러 개의 고개가 있다. 장건은 해발 3700m 지점에 있는 ‘테렉 고개’(Terek Pass)를 넘었다. 중앙아시아나 유럽으로 가려면 파미르 고원 북쪽에 있는 이 고개를 넘는 것이 가장 빠르다. 나중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 마르코 폴로, 징기스칸의 군대도 이곳을 지났다. 마르코 폴로는 고개를 넘는 데만 12일이 걸렸다. 현장이나 법현 등 인도로 가는 고승들은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이어지는 남쪽의 다른 고개를 이용했다.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 마지막까지 은신했던 아보타바드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

테렉 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100㎞ 정도 가면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오시’(Osh)가 있고, 90㎞를 더 가면 고대 중국인들이 ‘대완’(大宛)으로 불렀던 ‘페르가나’(Fergana)가 나온다. 현재는 우즈베키스탄에 속한다. 기원전 128년, 장건은 드디어 대완에 도착한다. 장안을 떠난 지 11년째 되던 해였다. 진즉 한나라와 무역을 하고 싶었던 대완은 장건을 환영했다.

대완의 도움으로 장건은 아랄해 근처 ‘강거’(康居, Sogdiana)를 거쳐 월지에 도착한다. 흉노에 패해 이곳으로 이주했던 월지는 ‘대월지’(大月氏)로 불렸다. 그러나 장건이 도착했을 때, 대월지는 ‘오손’(烏孫)에 쫓겨 그 곳에 없었다. 대월지는 장건이 도착하기 2년전 이미 남서쪽에 있던 그레코 박트리아를 정복해, 그곳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레코 박트리아는 기원전 325년 알렉산더 대왕이 정착시킨 그리스인의 후손이 기원전 250년쯤 세운 나라다. 중국에서는 ‘대하’(大夏)라 불렀다. 그 서쪽에는 ‘안식’(安息)이라 부르던 파르티아가, 더 남쪽에는 ‘신독’(身毒)이라 부르던 인도가 있었다.

이 당시 월지는 자기들의 선대 왕을 죽여 두개골을 술잔으로 사용했던 흉노에 대한 원한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월지와의 동맹은 물 건너갔지만 장건은 그곳에 체류하면서 서양 문물을 체험한다. 와인을 마시고, 와인 문화를 직접 접했다.

귀국 후 장건은 한무제에게 대하·대완의 와인과 ‘한혈마’(汗血馬)에 대해 보고한다. 사마천(司馬遷: BC145~86)의 사기(史記) 대완열전(大宛列傳)과 후한의 반고(班固: 32~92)가 쓴 ‘한서’(漢書)에 기록돼 있다. 삼국지의 여포와 관우가 탔던, 하루 천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도 한혈마다. 포도를 사기는 ‘蒲陶’로, 한서는 ‘蒲桃’로 표기했다.

“대완에는 일만석이나 되는 와인이 있다. 수십년 된 것도 있다. 사람들은 말(馬)이 알팔파를 좋아하듯 와인을 좋아한다.”

사기에 나오는 장건의 보고서 내용이다. 일만석은 40만 리터에 달한다. 알팔파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자라는 목초다.

페르가나(대완)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걸쳐 있는 분지 지역이다. 당시 서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사마르칸트와 더불어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 그리스인과 튀르크족이 섞여 동서양의 문화가 활발히 교류하던 국제 도시였다.

특히 소그드인은 장사와 교역에 능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입에는 꿀을, 손에는 아교를 바르고 금화를 쥐어 주었다. 달콤한 화술로 돈을 벌어 절대 놓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발해, 신라 등과 교역을 하는 등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교역을 장악했다.

1년 넘게 그곳에 있던 장건은 기원전 127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흉노를 피하기 위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쿤룬산 북쪽의 오아시스에 있는 서역남로(西域南路)를 택한다. 당시 이곳은 이미 포도밭이 무성했다.

장건은 장안에서 800㎞ 정도 떨어진 청해호(靑海湖) 근처에 도착한다. 하지만 황하를 건너려던 중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이번에도 흉노는 장건을 죽이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도 다시 만났다. 1년 정도 지난 기원전 125년, 흉노에 내란이 일어나자 장건은 다시 탈출해 드디어 장안으로 돌아온다.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00명의 사절단 중 돌아온 이는 오직 장건과 감보뿐이었다. 이때는 아내와 아들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와인이나 포도나무는 가져오지 못했다. 장건은 제후의 봉호를 받지만 흉노 출신 아내는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장건은 6년이 지난 기원전 119년, 300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다시 서역 행로에 나선다. 기원전 115년 장안에 다시 돌아올 때는 비니페라 품종의 포도나무와 석류, 한혈마를 가져왔다. 중국 본토에서 와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년 후인 기원전 114년, 장건은 5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장건이 개척한 길은 실크로드가 되어 이후 2000년간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와인은 실크로드 개척 전에 들어왔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 네이버에서 뉴시스 구독하기
▶ K-Artprice, 유명 미술작품 가격 공개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