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6일 한일 정상회담서 日총리 위안부 사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발언 이후 日과거사 전향적 태도
발언 이후 日우익으로부터 암살 테러당해 절명할 뻔
1993년 11월6일 한일 정상 확대회담 당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사진=e영상역사관) |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는 1993년 11월6일 김영삼 대통령과 단독으로 정상회담한 자리에서 위와 같이 발언했다. 역대 일본 총리 언급 가운데 과거사 사과에 가장 진일보한 것이었다. “모국어 교육 기회를 빼앗고 타국 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거나 창씨 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을 강제했다”,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한다” 등 발언도 나왔다.
두 정상은 이튿날 내외신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런 내용을 공식화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이 자리에서 “한반도 사람들이 여러 형태의 고통과 슬픔을 겪은 데 대해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진사드린다”고 다시 사과했다. 김 대통령은 “솔직한 자세에 감명받았다”며 “신뢰와 이해를 증진해 협력관계가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고 화답했다.
호소카와 총리의 당시 언급은 한일 양국이 관계를 개선하고 일본 정부가 과거사 사죄로 나아가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일본이 1993년 8월4일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있었지만,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것이지 정부 수장인 총리가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소카와 총리의 발언은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가 아닌 ‘회견’에서 한 발언이었다.
일본 정부 명의로 사죄가 나온 것은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담화’였다. 전후 50년을 맞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태평양 전쟁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자국의 책임을 확인하고 사과했다. 담화는 형식과 내용에서 부족하다는 비판도 뒤따랐지만, 내각 회의를 거친 것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전후 60년을 맞은 2005년 담화를 내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듬해 아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사죄의 입장을 유지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일본 총리.(사진=일본) |
일본 아베 내각은 2013년 무라야마 내각을 계승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입장을 거뒀지만 2015년 8월15일 전후 70주년 아베 담화에서는 명확한 사죄를 언급하지 않았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전후 70주년 담화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아베 내각을 향해 “나의 회견과 무라야마 담화 정신을 훼손하면 해로운 담화가 될 것”이라며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라”고 촉구했지만 소용없었다.
호소카와 총리는 1994년 4월28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기업에서 정치자금을 빌려쓴 게 발단이었다. 총리로 퇴임 한 달여인 1994년 5월30일 암살 테러를 당했다. 우익단체 회원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총알은 빗나갔다. 범인은 호소카와 총리가 재직 시절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침략자이고 주변국에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한 데에 분노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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