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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베트남인 학살 배상 소송 저지 방안' 은밀히 알아본 한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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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소송 제기 우려, 비밀리 대책 준비
양국 관계 격상 추진하던 베트남 '당황'
수교 30주년… 韓정부 기조 여전히 불일치
한국일보

1971년 12월, 6년간의 베트남전 파병을 마치고 부산항 제3부두에 도착한 한국군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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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 확산을 막기 위해 베트남에서 법리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 일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낸 데 이어 피해자들이 배상 요구를 보다 조직적으로 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취지다.

정부의 선제적 대응은 "베트남이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배상 갈등 사례를 연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졌다. 베트남이 '일제의 피해자인 한국의 경험'을 선례 삼아 한국에 배상을 압박할 가능성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가 외교·사법 분쟁에 대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베트남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 인정엔 성의를 보이지 않은 채 자기 방어에만 힘을 쏟는 것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나라'로서 이중적 대처라는 비판을 살 여지가 크다. 정부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의지가 없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베트남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베트남은 과거사 문제의 돌출이 올해 양국 수교 30주년의 의미를 깎아내릴 가능성을 우려한다. 양국은 외교 관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베트남 현지 소송 막을 방법 조용히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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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로 가족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한국을 상대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응우옌티탄씨가 지난 8월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탄씨는 같은 달 열린 국가배상소송 공판에 원고로 출석해 한국군의 학살을 증언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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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한국과 베트남 외교가와 법조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올해 7월 국내 A로펌의 베트남 본부에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베트남 정부나 민간이 소송을 낼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소송을 한다면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문의한다"는 내용의 자문 요청서를 보냈다. 정부는 "베트남 측이 최근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별도의 연구를 진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후속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니 각별한 보안을 당부한다"는 취지로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베트남 측이 당시 연구를 진행한 건 법적 다툼에 대비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올해 6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으로 '300억 원대 한일 공동기금 조성안'이 검토된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 내용을 통상적으로 검토하는 차원이었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는 기조가 분명한 베트남은 정부 차원에서 한국군 학살 의혹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A로펌은 "베트남 사법 체계는 베트남인들이 베트남 법원에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소송을 하지 못하도록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베트남이 국제사법재판소 등에 제소할 가능성과 움직임 역시 전무하다"고 회신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최근까지도 정보망을 총동원해 현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등 베트남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정부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한국에 항의의 뜻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엇갈리는 대응… 정부의 일치된 사과와 위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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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에 의해 주민 135명이 학살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 마을에 설치된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위령비는 현재 한국 측의 반발로 희생자 명단 부분이 가려진 채 유지되고 있다. 더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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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정부 대응이 줄곧 엇갈렸다.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것에 미안하게 생각한다"(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 "우리 국민은 마음의 빚이 있다"(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양국 간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등의 발언을 통해 역대 진보 정권 대통령들은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올해 8월 한국에서 진행된 베트남인 학살 의혹 국가배상소송 8차 변론기일에서 "피해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학살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보안문서와 베트남 피해자·한국군의 진술 등 증거를 무시하고, '전쟁의 특수성'을 주장했다.

공판이 끝난 뒤 원고인 응우옌득쩌이는 한국 기자들에게 "한국에 배상을 요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한국이 (일치된 마음으로)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이 마을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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